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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Feb 09. 2023

덕통사고 그날 이후..

뮤지컬

  40대 이전까지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 참 이야깃거리가 없다. 공부하는 게 좋아서 책상 앞에 줄곧 앉아있기만 했던 학창 시절, 시계추처럼 회사와 집만 반복해서 오가던 회사생활,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고 난 뒤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채로운 삶의 모습을 구경하는 시간, 새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에 내 안에 들어온 상쾌한 공기는 잠들어있는 나를 깨웠다. 각 잡힌 틀에 박혀서 좋을 걸 봐도 좋은지 모르던 사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씩 새롭게 경험하던 어느 날,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신기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뮤지컬 덕후였던 남편은 연애 시절 나에게 뮤지컬로 첫 데이트 신청을 했다. 무슨 공연이 좋은지, 어떤 배우가 잘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남편을 따라서 공연장을 종종 갔다. 흥겨운 음악과 화려한 무대를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이 그냥 좋았다. 어쩌면 공연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뮤지컬 관람일에 이루어지는 데이트 코스가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만나서 밥을 먹고 공연장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관람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우리가 꽤 근사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공연을 같이 보고 나면 서로 공감하며 나눌 수 있는 대화거리가 하나 생기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몇 년간 뮤지컬을 즐기던 우리 부부의 공통 취미생활은 육아가 시작되면서 중단됐다.


  1년 전쯤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뮤지컬 티켓을 주며 공연을 보고 오라고 했다. 티켓은 한 장뿐이었다. 아이가 꽤 크긴 했지만, 아직 아이를 혼자 두고 공연장에 가서 무대에 집중할 만큼 아이가 다 큰 건 아니었다. 그러니 같은 공연을 다른 날짜에 번갈아가며 보고 오자는 것이었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혼자 궁상맞게 무슨 공연장에 가냐고 핀잔을 줬다. 10년 넘게 문화생활에 목말라있던 남편은 참지 못하고 혼자 먼저 공연장에 다녀왔다. 오래간만에 즐긴 공연이 꽤나 좋았는지, 나보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며 내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그렇게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공연장 객석에 가서 앉았다.


  팬데믹 기간이라서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혼자 공연장에 앉아있는 게 생각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막이 오르고 나니 그때부터는 혼자라는 게 더 이상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첫 무대부터 화려하고 볼거리가 굉장히 많은 공연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어느 순간부터 내 시선이 한 사람만 계속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마치 첫눈에 누군가에게 홀딱 반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참 묘했다. 그날부터 나는 연일 인터넷 초록 창과 빨간 창을 오가며 배우 이름을 검색했고, 관련 기사와 영상을 며칠 만에 다 독파했다. 급기야는 팬카페 가입까지 하게 되었다. 40년 넘게 살면서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춘기 소녀 때도 팬이라고 스스로 칭할 만큼 유난히 좋아했던 연예인이 없었는데, 아주머니가 되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러 달 동안 아무에게도 팬카페에 가입했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마치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하고  마음을 치고 들어온 사람은 이충주 배우다. 내가 뮤지컬을  보고 살던 10  사이에 데뷔해서 현재는 주연급 정상 자리까지 오른 분이었다. 어린 시절에 연예인 쫓아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었다. 온전히 나를 위해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고 따라다닌다는  시간낭비 같아 보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겪어보지도  사람이  모르고 했던 막말이었다.


  한 분야에서 최정상의 자리까지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는지, 현재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 연예인은 단순히 노래와 연기를 하는 공연쟁이가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에 짧은 힐링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다. 매주 5일씩 라이브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해 자기 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하는지, 팬이 되어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순간 감탄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비싼 티켓값을 내고 귀한 시간을 내어 발걸음을 해준만큼, 매 공연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노래하고 연기를 펼치기 위해 보통 애를 쓰는 게 아니었다.


  얼마 전 팬미팅이 있던 날은 배우에 대해 좀 더 자세한 뒷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시력이 굉장히 안 좋은 데다가 심각한 난시 증상이 있어서 대본을 볼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3시간짜리 공연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으면 대본 분량이 꽤 될 텐데, 대본을 볼 때마다 글자가 둥둥 떠다니고 빙글빙글 돌아다닌다고 상상하니 끔찍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본을 받자마자 최대한 빨리 외워버리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그 결과 뮤지컬계에서는 대본을 가장 빨리 외우는 배우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살다 보면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며 핑계를 대다가 결국 그 분야를 떠나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하지만 약점을 넘어서서 자신의 새로운 강점을 하나 만들어내는 게 성공하는 사람들의 비결인가 보다. 눈호강, 귀호강하고 싶어서 팬미팅에 참석했다가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나의 팬심이 더 두터워져서 돌아왔다.


  요즘은 이충주 배우가 뮤지컬 물랑루즈 공연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물랑루즈가 궁금하다며 남편도 공연을 보고 왔다. 그날부터 남편은 나와 같은 배우를 칭찬하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봐도 반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배우라서 아내의 덕질을 인정하고 지원해주고 싶다고 한다. 나는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집안을 치워두고 반찬까지 신경 써서 만들어두고 나가게 된다. 내 할 도리는 말끔히 끝내 두고 가야 취미생활을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 입장에서는 아내가 공연장에 가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깨끗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아내의 덕질을 막을 이유가 없다.


  한 가지 방해 사유가 있다면 돈 문제다. 하필 좋아해도 라이브로 즐겨야 제맛인 뮤지컬 관람을 좋아하게 된 탓에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그래서 어제는 남편과 대화 끝에 해결책을 하나 마련했다. 연간 취미생활 예산을 정해서 별도 통장에 넣어두기로 했다. 이제는 나에게 새로운 통장이 하나 생겼다. 바로, 뮤지컬 통장! 이제는 티켓팅을 한번 할 때마다 살림이 어려워질까 봐 걱정하지 않고, 정해둔 예산 안에서 편하게 즐기기로 했다. 덕질도 하다 보니 조금씩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다. 놀아본 사람이 더 잘 놀고,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이왕 시작된 덕질이니 최대한 현명하게 즐기고 싶다. 취미 생활도 살림도 잘하는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더 자주 공연을 보러 다닐 수 있게 경제 활동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남편과 다시 나란히 객석에 앉아 뮤지컬을 볼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길 기다려본다. 가끔은 아이까지 셋이 함께 공연장을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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