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책임감
딸아이가 학교에서 2박 3일 수련회를 간다고 한다. 학교마다, 해마다 활동 계획이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는 5월이면 전 학년이 여행을 떠난다. 1, 2학년은 수련회를 가고, 3학년은 수학여행을 간다. 작년에는 중학 생활이 익숙지 않아서 아이의 수련회 기간 동안 엄마의 외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올해는 2년 차 중학생 학부모라서 미리 학사 일정을 파악하고 엄마의 힐링 코스를 마련했다.
아침 일찍 아이를 배웅하고 나는 남편과 반려견을 데리고 제주도로 향했다. 강아지를 데리고 여유롭게 제주의 자연을 누리는 로망을 실현하러 떠나게 된 것이다. 나는 여행 갈 때면 파워 J 기질이 발휘돼서 미리 치밀하게 계획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조만간 장기 해외 출장을 앞두고 있는 신랑은 몸과 마음이 바빠 보였다. 미리 끝내둬야 할 회사 일이 많은 분위기라서 이번 여행 콘셉트는 ‘휴식’으로 정했다. 강아지를 동반할 수 있도록 항공, 숙소, 렌터카만 미리 준비해 두고 모든 일정을 발길 닿는 대로 즐겨보기로 했다.
강아지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일이 조금 걱정되긴 했다. 아이가 어릴 때 처음 비행기를 탈 때처럼 말이다. 우리 집 반려견은 소형견이라서 기내 동반 탑승이 가능했다. 물론 기내에 있는 동안 케이지 안에서 강아지를 꺼낼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강아지는 1시간 동안 케이지 안에서 얌전히 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제주 땅을 밟게 되었다.
반려견 동반 가능으로 검색하니 숙소 선택지가 확 줄어들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한적한 제주 동네, 월정리에 가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나니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다 만족시키는 집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강아지를 데리고 매 끼니를 밖에서 먹는 편보다는 간단히 밥 해 먹을 수 있는 취사 시설이 있었으면 했다. 이왕이면 제주의 바람을 느끼며 맥주 한 캔 할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숙박비가 너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여러 가지 희망 사항을 다 만족시키는 집을 한 채 빌릴 수 있었다.
제주에 머무는 2박 3일 동안 휴식을 취하는 일, 그것 말고는 딱히 한 게 없었다. 조용한 해변가에서 산책하고, 5월의 제주 꽃구경을 하고, 하루에 한 끼 근처 맛집을 찾아가는 게 전부였다. 평소 딸내미를 데리고 여행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우리 딸은 액티비티를 굉장히 좋아하는 활동적인 스타일이다. 오래간만에 아이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인 만큼 뒹굴뒹굴 쉬며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 기간 동안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아무래도 내 집이 아니다 보니 한시도 강아지한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탓이었을까? 김포 공항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1시간 남짓이 꽤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운전대를 잡은 이상 긴장감을 풀 수는 없었다. 남편도 피곤한지 옆 자리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운전을 못하는 남편은 아내 고생시키는 일을 하는 게 미안한 모양인지, 웬만하면 차 끌고 어디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에도 같이 길을 봐주며 긴장을 내려놓지 않는데 이날은 꽤나 피곤했나 보다.
조용한 차 안에서 혼자 가속 페달에 발을 붙였다 뗐다 반복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친정 아빠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처럼 직장에 휴가 내기가 쉽지 않던 시절에도 아빠는 주말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떠났다. 주말을 꽉 채운 일정이라 늦은 밤 귀가할 때쯤이면 식구들은 모두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려면 몸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는 아빠의 노력은 주말마다 반복됐다. 그때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게 우리 가족의 주말 일상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갑자기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다 바로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라도 당장 듣고 싶었다. 아빠는 동네 어르신들과 저녁 식사 중이시라며, 평소보다 더 점잖게 전화를 받으셨다. 여행 갔다가 안전히 잘 귀가했다는 상황 보고만 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두어 시간 후 전화벨이 울렸다. 친정아빠였다. 이번달부터 아파트 회장으로 뽑혀서 주민들 의견 들을 겸 저녁을 사셨다고 한다. 어제는 두유를 한 박스 사서 단지 노인정에 인사도 다녀오셨다고 한다.
한 달에 30만 원씩 월급을 받으실 수 있다고 하셔서, 첫 월급 받으면 삼겹살을 사달라고 농담을 건네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회장이 되고 보니 마을 주민들 위해서 돈 쓰다 보면 자식들 밥 사줄 돈은 없을 것 같다고 하신다. 왜 나만 밥 안 사주냐고 나도 좀 사달라고 했더니 펄쩍 뛰면서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하셨다. 웃음이 났다. 뭐 하나 맡으시면 온 마음을 다해 책임감을 보여주시는 분, 그렇게 가족을 위해서도 헌신하셨구나 싶었다.
고작 힐링 여행 다녀와놓고 피곤하다며 짐 정리도 안 하고 거실에 쌓아둔 채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얼른 글 마무리하고 집 정리부터 해야겠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했는데, K 가장에게만 부담을 쥐어줄 게 아니라 나도 내 맡은 역할에 충실해야지… 여행 추억은 고이 추억 상자에 넣어두고, 오늘을 또 열심히 살아보자! 아빠처럼, 책임감 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