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관람에 이어 각본까지 산 건 나름의 ‘헤어질 결심’이었다. 그러면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이야기에 그만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습관처럼 헤어질 결심을 검색해서 상영관이 있는지 찾곤 하는걸 보면 그 정도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헤어질 결심을 보러 갔던 세번의 밤엔 우연히도 모두 비가 내렸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 늘 곧장 집으로 가기가 힘들었는데, 우산을 쓰고 어둑해진 거리를 정처없이 꽤나 걷고 나서야 간신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축축한 여운이 마음을 물먹은 솜처럼 만들어버린 탓에 한 걸음, 한걸음 마음의 무게를 줄이고 나서야 집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첫번째 관람을 마친 후에 누군가 내게 헤어질 결심에 대해 물으면 나는 ‘첫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답하곤 했었다. 대부분의 경우 ‘미결’로 남게 되고 ‘무너지고 부서짐’의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그것이니까. 해준과 서래를 기혼자로 설정한 것도 오히려 둘의 사랑을 더욱 ‘첫사랑’으로 보여지게 하려는 설정이 아닐까 싶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번째, 세번째 관람을 마치고 각본까지 사서 읽고 난 뒤엔 헤어질 결심은 ‘첫사랑’이란 테두리로 가둬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헤어질 결심의 각본과 영화는 다른 듯 닮은 형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본이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동생이라면, 영화는 과묵하고 비밀을 간직한 듯 의뭉스러운 형 같은 느낌이다.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둘이지만 둘 다를 보고 나면 생각보다 다른 느낌에 예상치 못한 재미를 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장면의 순서가 서로 다르다 던지,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면이지만 각본에서는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던지 하는 것인데, 특히 서래에 대한 묘사에 있어 가장 큰 차이가 있었던 거 같다. 각본에서는 문자를 통해 서래를 보게 되고, 영화에서는 ‘탕웨이’라는 배우를 통해 서래를 보게 됨에도 나는 오히려 각본 상의 서래의 윤곽이 더욱 또렷하게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영화에서의 서래는 은밀하고 신비로운 느낌인 반면 각본에서의 서래는 좀 더 대담하고 인간적인 부분이 노출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해준과 정안(이정현)의 아들인 ‘하주’의 존재 역시 각본과 영화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영화에서는 초반 해준과 정안(이정현)의 대화를 통해서만 존재를 알 수 있는 아들 ‘하주’가 각본에서는 해준과의 통화 장면으로도 등장하는데, 영화 상에서 해준이 호신(박용우)에게 건네는 대사인 “원전은 완전 안전하거든요.”도 각본에서는 하주가 해준에게 먼저 들려준다.
해준과 정안의 아들인 하주라는 존재가 영화상에서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 ‘불륜’이라는 색을 좀 더 옅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어떤 관계성에 주목하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것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아는 사랑의 정의 중 가장 와 닿는 말은 ‘해적질’이다. 인류 최초의 로맨스라고 불리는 롱고스의 『다프니스와 클로에』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해적질, 이것만큼 단순명료하게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사랑은 끊임 없이 서로 상대방을 빼앗고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상대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알고 싶고, 자신이 항상 상대의 첫 번째가 되고 싶어하는 격렬한 마음, 행복한 시간 뒤에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감, 종속되고 종속하고자 하는 행동들, 이런 것들 모두 해적질이 아닐까.
헤어질 결심의 서래와 해준 역시 러닝타임 내내 서로에 대한 해적질을 멈추지 않는다. 해준의 시선이 ‘의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머물게 만들었던 ‘꼿꼿한’ 서래나 자부심으로 인해 ‘품위’를 갖추고 있던 해준의 모습은 서로 앞에선 무색해질 뿐이었다.
그녀는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라는 말을 남기고 녹음된 그의 목소리 속으로 영원히 침잠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지금 내게 누군가 헤어질 결심에 대해 물으면 ‘미완’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영화라고 답할 것 같다. 서로의 모든 것을 앗아가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에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아니, ‘이루어진다’는 말 바깥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다프니스는 아직 어린 데다가 시골에서 살고 있었고 사랑이라는 해적질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