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2020)
내 나이 올해로 스물여섯, 중학생 때를 떠올려보려면 얼마 전인 것 같아도 10년 전을 돌아보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중학교 시절이라고 하면 몇몇 큼직한 사건들 외에는 떠오르지 않지만, 어렴풋한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그 시절의 나는 별 거 아닌 이야기로 친구들과 한참을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더 친구와 웃고 떠들고 싶어 하굣길에는 제 집을 지나쳐 친구 집을 들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무슨 이야기를 했냐 하면, 별 거 아니다. 정말 별 거 아니라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재잘거리는 소리와, 대화의 사이에 흘러갔던 다양한 감정들, 해가 막 하루의 절반을 넘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채비를 시작하는 하굣길의 하늘 색깔 정도다. 그리고 아마도, 시간이 지나 점점 더 기억의 희미해진다고 해도, 그것들만큼은 어렴풋한 느낌일지언정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종착역>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되어 첫여름방학을 맞이한 네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진 동아리에 속해있는 이 아이들의 여름방학 숙제는 '세상의 끝'을 찍어오는 것. "안 해가도 봐주시지 않을까?" 라며 보통의 아이들처럼 방학 숙제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다가도 이내 아이들은 세상의 끝을 찍기 위해 1호선의 끝자락에 있는 종착지, 신창역으로 향한다. <종착역>은 아이들의 로드트립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멀게는 롭 라이너 감독의 <스탠 바이 미>를, 가깝게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을 떠올리게 한다. 지하철을 타고 떠나는 <종착역>의 여정은 당장 <우리집>의 하나와 유미, 유진이 시외버스를 타고 훌쩍 떠나는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안전하게 보인다. 아이들이 겪는 사건의 무게감도 그렇다. 그러나 네 아이가 겪는 모험이 아기자기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도심을 벗어나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다는 것은 어른들에게는 별일이 아닐지 몰라도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매우 커다란 모험이다. <종착역>은 중학생들의 이 소박한 어드벤처를 정확히 중학생의 무게감만큼 담아낸다. 네 친구의 모험은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적이지 않고, 아무것도 안겨주지 않을 정도로 가볍지도 않다.
영화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아이들에 집중한다. 아이들이 마주하고 지켜보는 세상에 주목하기 위해 낯선 시골의 정경을 카메라로 담아낼 법도 하지만 카메라는 단지 묵묵히 아이들을 지켜보고 이따금씩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를 응시할 뿐이다. 아이들이 바라본 세상은 과제를 위해 받은 일회용 필름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잠깐 인서트 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모 네티즌의 표현처럼, 숙제 검사를 하는 것 같이 아이들이 찍은 사진을 보는 일은 아이들의 시선과 시야를 짐작하는 대신 말 그대로 확인하게 한다. 낯선 환경과 벌어지는 사건들에 집중하는 대신 영화는 네 아이에 오롯이 집중한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이나, 친구들 사이에 얕게 찾아오는 위기감을 놓치지 않고 주목할 수 있게 된다. 이 역시 딱 중학생 무게만큼의 감정과 위기감이지만, 그 나이대에 느낀 세상의 크기는 딱 그만큼이었으니,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포착이다.
어린이 내지는 청소년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낯선 환경에서 벌어진 극적인 사건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종착역>이 획득한 성장의 감각은 유난히 다르다. <종착역>의 이야기는 사건과 갈등의 해결을 통해 한 뼘 앞으로 나아가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닌, 확인과 발견을 통해 확장해나가는 감각에 가깝다. 갈등이랄 것은 거의 없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잠깐잠깐의 위기감만이 찾아올 뿐이다. 천안역에 잘못 내렸다거나,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거나, 길을 제대로 찾은 게 맞냐며 투덜대고, 친구 하나가 잠시 사라졌다거나. (마지막 건 조금은 큰 사건처럼 보이지만.) 투덜거림과 짜증의 순간에는 금방이라도 아이들이 싸울 것 같지만, 오히려 뒤이어 붙는 쇼트들은 모두 다시 아주 작은 일을 통해 해맑음을 되찾는 모습들이다. 송희가 잠시 사라져 한참을 찾아 헤매는 일도 얼마 뒤 고양이를 만나 밥을 주던 송희를 찾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해결된다. 지도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냐고 투닥거리다가도 빗물을 갖고 장난을 치며 곧 밝아진다. 아이들은 서로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발견할 뿐이다.
<종착역>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수다는 서사적으로 기능하는 대사이기보다는 영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배경음악에 가깝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근데 있잖아, "로 시작하는 이 실속 없는 대화들은 때때로 아무 연관 없는 주제로 이어지기도 하며, 또 그렇게 실속이 없고 맥락이 없기에 사랑스럽다. 각본에 쓰여있을지 궁금할 만큼 모든 대사들은 아이들의 대화 한 단락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고, 이따금씩 발음이 뭉개져 대사가 잘 안 들리기도 하는 일은 불만을 자아내기보다는 현실감을 더한다. 영화 속 대사를 듣는 것보다 여행길에 오른 아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배역 이름을 따로 받은 것이 아니라 실제 배우의 이름이 모두 고스란히 영화 속에서도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을 형성한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모습은 마냥 귀엽게 보이면서도 그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종착역>이 순수하게 담아낸 순수한 시절은 자꾸만 나의 순수한 시절을 꺼내보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별 거 아닌 이야기를 하며 깔깔대던 즐거움과, 친구와 사이가 조금이라도 틀어질 것 같으면 불안해하던 그 얕은 위기감을 스크린 위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네 친구가 마주한 세상의 끝이 아이들이 인식하는 세상의 가장 바깥 껍질이었듯, 그 시절의 나도 아직 세계를 넓혀가는 중이었으니까.
<종착역>의 마지막은 모험을 마치고 무사히 아이들이 돌아온 곳이 아닌 모험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지점이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극복해낸 것은 아니다. 대단한 보물을 얻어낸 것도 아니다. 다만 몇 가지 확인했을 뿐이다. 전학을 와서 이렇게 금방 친해지기도 하고,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할 때는 멀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지기도 하는 순간들을. 어쩌면 사춘기는 모든 관계를 내 곁과 그 바깥으로 구분하던 시기에서 관계의 다양한 거리감을 인식하는 단계의 초입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나 말고 다른 친구와 더 친해 보이는 내 친구를 질투하다가도,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곤히 잠든 친구들 사이에서 먼저 일찍 깨어나 문 밖을 바라보던 시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 중학생 시연은 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어린 날의 모험을 되짚어보는 어른 시연일 것이다. 영화 <종착역>은 담담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오히려 그 자리에 나를 앉혀 감상하고 추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