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2021)
서부극은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단순한 장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연구자가 지적하듯 서부극은 서부개척의 프런티어 정신이 담긴 미국의 건국 신화이자 역사이다. 문명이 닿지 않은 야만의 황야에 문명의 질서를 가져다 놓는 것이 바로 서부극 서사의 소명이고 개척시대의 사명이다. 그렇기에 서부극은 단순히 황야의 무법자가 총질을 하며 악당을 무찌르는 액션 영화 장르가 아니라 개척정신이라는 미국인들의 이념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니 신화니 하는 것들이 그렇듯 서부극도 이제는 주류 영화에서 퇴장한 지 오래다. 이제는 따분한 옛날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이제 미국의 개척정신은 낡은 정신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개척정신 속에 묻혀 지나갔던 그들의 과오를 바로잡듯 반성하는 수정주의 서부극을 거쳐 서부극은 거의 완전히 할리우드에서 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2021년은 참으로 이상한 해다. 퇴장한 줄로만 알았던 서부극들이 다시금 스크린 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옛날의 그 서부극들은 아니다. 저마다 현대의 모습에 맞게 옷을 갈아입었다. <노매드랜드>, <바쿠라우>, <미나리>, <퍼스트 카우>, <파워 오브 도그> 같은 영화가 바로 그 예다. 그들은 흔히 '네오 웨스턴'이라고 불린다. 무릇 장르라는 것이 그렇듯 이들이 모두 어떤 특정한 코드를 동일하게 만족하기 때문에 하나의 장르로 묶여 불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부극을 표방한다. <미나리>는 미국에 이민 온 한인 가족이 남부의 미개척지에 어떻게 정착하고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지를 그렸다는 점에서 서부극스러우며, <노매드랜드>는 황무지를 떠돌며 살아가는 여성의 시점을 통해 현대의 서부를 그려낸다. 이렇듯 서부극은 어찌 됐건 미국 사회다.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를 썼고, 미국의 역사는 서부극을 썼다. 서부극은 결국 미국이기에, 네오 웨스턴으로 서부극이 부활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예사일 수도 있다.
<퍼스트 카우>에 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서부극에 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퍼스트 카우> 역시 서부극과 역사의 관계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퍼스트 카우>는 강 위에 큰 배 하나가 오른쪽에서 나타나 왼쪽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육중한 배의 소음과 이미지가 자연 풍광을 가른다. 뒤이어 강아지와 한 사람이 등장하고, 강아지가 땅을 파는 동안 배경에는 기차의 기적 소리와 비행기의 비행 소음이 자리를 채운다. 강아지가 땅을 파고, 땅 속에서는 나란히 누워있는 두 사람의 유해가 발견된다. 강에는 작은 배 한 척이 지나가고, 나무 위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장면이 이어진다.
너무나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이 장면들은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중한 배, 기차, 비행기의 소음. 그에 비해 턱없이 소박한 자연의 풍경. 이어질 이야기의 배경이 서부개척시대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이 대립구도의 상징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서부극을 대표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 아니던가. 유해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대립 구도의 전환점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큰 배, 기차, 비행기 / 작은 배, 앙상한 나무, 새소리. 그런데 이것을 다시 살펴볼 때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흐르는 강물 위에 떠가는 큰 배와 작은 배 이미지의 대조. 작은 배가 자연의 상징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박한 자연을 상징하기 위해 뭣하러 애매하게 배를 끌어와서 쓰겠는가. 이미 육중하고 거대한 배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여줬으니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 큰 배와 작은 배의 대립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퍼스트 카우>에는 자주 배가 등장한다. 첫 시퀀스 이후로도, 틸리컴에 첫 번째 소가 들어올 때 타고 오는 것도 배고, 빵을 만들기 위해 우유를 훔치는 범죄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주인공 두 사람의 앞에 나룻배가 한 척 지나간다. 소 젖을 훔치다 들켜 두 사람이 도망칠 때 한참을 달려가 킹 루는 배를 얻어 탄다. 화면에 등장하는 것의 중요도는 화면에서의 크기가 결정한다고 어느 감독이 말했던가. 가장 첫 장면부터 화면의 절반 가까이를 채우며 등장하는 배. <퍼스트 카우>에서 배는 분명 배라는 사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상선과 작은 통통배의 대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모습을 비추는 배. 여기서 다시 한번 서부극과 역사의 관계를 끌고 올 필요가 있다.
흔히들 서부극이 개척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역사 속 어딘가 미국의 한 풍경을 떼어다 놓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같은. 그러나 배리 랭포드는 『영화 장르: 할리우드와 그 너머』에서 서부극이 다루고 있는 프런티어 신화의 역사가 말 그대로 '신화화된 버전의 역사'임을 지적한다. 역사를 가지고 서부극을 썼다고 하지만, 실은 서부극도 자신만의 버전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서부극은 역사를 의식적으로 신화화한 결과다.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를 기록했다기보다 직접 기술하고 있는 셈이다. 정원과 황야가 대립하고, 비열함과 야만이 들끓은 미국의 역사에 관해. 그것이 바로 서부극이 만들어낸 미국의 건국신화이며, 미국인으로서 가슴 한켠에 품은 프런티어 정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퍼스트 카우>는 그것과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다. 골드러시 즈음을 배경으로 하여 시대적인 상황은 여타 서부극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지만, 이야기의 외양은 너무나도 다르다. 황야가 아닌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총잡이도 없고, 야만인도 없다. 주인공은 시가를 입에 물고 석양을 바라보는 대신 소 젖을 훔쳐다 비스킷을 굽고, 스콘을 굽는다. 이 이야기는 악당을 물리치고 황야로 떠나는 무법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중국에서 온 킹 루와 미국인 쿠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렇게 자신만의 서부를 그린다. 그리고 자신만의 서부를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존의 서부영화가 자신만의 건국신화를 써 내려갔듯, <퍼스트 카우>도 자신만의 건국신화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비열함과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건국신화가 아니라, 우정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미국의 건국신화를. 서부극이 그것의 상상적 경계를 놓고 국경을 넓혀가는 동안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역사에 관해 써 내려가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에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면, 큰 배와 작은 배의 대조는 문명과 야만의 이항대립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 서부극의 커다란 몸집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개척정신 뒤의 작고 소박한 이야기를 조명하려는 것에 가깝다. 역사라는 물결 위에서 함께 흘러가고 있었던 작고 소박한 이야기. 배는 이야기와 사건 그 자체다. 그렇기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화면에 배가 등장하는 것이다. 우정의 이름으로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의지는 극 중 킹 루의 입을 빌어 표현된다. "역사의 손길이 아직 들이닥치기 전이야. 우리 방식대로 역사를 맞을 수 있어." 역사의 한 축이 비대한 몸집을 자랑할 때, 다른 한 축도 고요히 운동하고 있었음을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은연중 보여준다. 틸리컴에서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연주 소리 뒤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것이 바로 그 예다. 돼지의 죽음은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바이올린 연주자만을 카메라는 비춘다. 야만과 우정이 서부에 동시에 존재했음을, 그리고 <퍼스트 키우>는 그중 우정에 시선을 맞춰 역사를 기술할 것임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나란히 누워 평온을 되찾는 킹 루와 쿠키의 마지막 모습은 첫 장면에서 나란히 누워 발견된 유해의 모습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다만 순서는 뒤바뀌어있다. 죽은 모습을 먼저 보여준 뒤 죽기 전의 이야기를 영화 내내 말한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이 우정으로 쓰인 서부극의 역사를 발굴해 기술할 것임을 오프닝 시퀀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집은 무너졌다. 소 곁에는 울타리가 쳐졌고, 두 사람은 도망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친 이들은 평온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들의 평온함을 담아낸다. 카메라는 그들의 평온함을 통해 비열한 서부의 뒤편 따뜻하고 달콤한 우정이 있었음을 다시 써 내려간다. 서부란 어떤 곳인가. 미국이란 어떤 가치인가.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대답은 벌꿀을 바른 비스킷과 나란히 누워있는 두 사람의 유골이다. <퍼스트 카우>는 대안적 서부가 아니다. 우정의 이름으로 다시 써낸 서부의 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