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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Sep 16. 2024

백만 가지의 감정, 결코 죽지 않아

Tortoise [Millions Now Living Will Never

이번에 글을 준비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그간 음악을 들으며 이를 머릿속에서 다른 형태로 형상해 볼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새삼스러운 인식이다. 음악이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소리를 단지 그 자체로써 공명하고 그 진폭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다른 어떤 행위의 필요성이랄 게 있을까? 예술인에게 '표현'이란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인 무언가로 끄집어내는 과정이라면, 나는 완벽히 반대의 지점에서 그 레코딩 결과물을 카세트데크에 집어넣고 재생을 하는 행위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좋은 소리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했으며 그 속에서 유영하고 잠수하였다. 누군가에게 나의 느낌을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공감을 바라지도 않았고, 어딘가에 빗대어 조심스레 단어를 만지작거릴 필요도 없었다. 후아, 나는 정말 삼십여 년 동안 충실히 이 재생의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을 가지고 매거진에 글을 쓰려면 다른 방식으로 듣는 행위 또한 필요하다는 인식이 따라왔다. 그동안 조용히 유영했던 행위 자체를 어떤 덩어리로 내보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스쳐가는 시간들이 보여주는 풍경을 자동차의 차창처럼 표현해 본다거나, 여러 색채를 혼합해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후두둑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비트가 전해주는 기분, 내 경험과 음악이 혼재되었을 때 나오는 감정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려봐야 할 때도 있다. 음악가가 곡을 만들 때의 원 의도가 어떻든 간에, 내 몸속을 돌아 나온 소리를 형태로 만들어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그간 음악을 흡수하여 몸속에 곱게 축적해 오던 과정과는 완전히 다른 행위이다.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누. 바보 아냐?

그렇긴 한데, 정말 난 지금껏 내가 어떤 식으로 음악을 듣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어떤 상태로도 변화시키지 않고 세포에 새기는 방식으로 들어왔더라. 그리고 음악 한 스푼의 위로를 아흔아홉 꼭지까지 쓰게 된 지금에서야 다른 방식의 음악 향유하기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즉 표현이란 형태를 전제로 하는 음악 듣기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업을 가진 분들의 방식일까? 바보같이 새삼스럽긴 한데 지금까지 인지를 못하고 있었으니.... 이건 호불호를 따지기보다는 그 다른 면을 각자 집중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원형 그대로를 새기는 음악 듣기는 작가와 동화해 보려는 방법이다. 자신의 몸을 통과한 후 변형된 무언가를 끌어내려는 행위는 또 다른 적극적인 음악 듣기이기도 하다.

Tortoise 토터즈의 음악을 듣는다. 이들의 소리가 나를 관통한 후 만들어진 것을, 글이란 표현으로 갈무리를 하던 중 깨닫게 된 단상들. 내가 평생 음악을 들었던 방식,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듣기의 형태.



Rock이란 광범위한 장르에서 Post Rock 포스트 락, 혹은 Instrumental Rock 인스트루멘탈 락이라 이름 짓는 구조적인 음악에 대해 벌써 세 밴드의 음악들을 매거진에 소개했다. Stereolab 스테레오랩, TOE 티오이, Red Sparowes 레드 스패로우즈가 이들이다. 이 장르는 내게 음악을 듣는 시야를 넓혀 주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편애하는 게 보인다. 앞으로도 몇 꼭지 더 쓸 게 남아있기도 하니 말이다. 소리가 내 안으로 들어와 흐르고 있는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쾌감은 구조적인 음악의 중요한 강점이다. 정해진 답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클래식을 즐기시는 독자님들은 이를 잘 이해하실 것 같다. 그리고 이 포스트 락의 원조 격인 밴드로 Tortoise 토터즈를 중요한 지점으로 많이들 얘기한다. 재미있는 것은 Tortoise의 음악이 오히려 이후 유사한 장르를 칭하는 밴드들과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단 점이다. 이후의 밴드들이 기승전결에 기반한 드라마틱한 서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Tortoise의 음악은 보다 형식미 자체에 집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연구자 마냥 음악은 꽤나 침착하고, 아기자기하다. 그래서 이들을 함께 묶는 것에 대해서 별로 동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이들을 1세대 선배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마, 7, 80년대 Rock이라는 고정적인 틀을 넘어 마음대로 확장을 시켜도 된다는 확신을 후배들에게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최고의 신호탄으로 1996년에 발매된 [Millions Now Living Will Never Die] 앨범을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이를 접한 이후에 나의 시야 또한 한차례 더 확장이 되었으니 고마운 음악이기도 하다.

앨범을 들어보면 드럼과 베이스가 근저에서 큰 역할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철골과 같이 단단하게 맥을 짚어주며 나간다고 할까. 그리고 그 구성의 중심에는 드럼과 비브라폰, 그리고 프로듀싱까지 맡은 브레인 John McEntier 존 맥킨타이어가 있다. 음악을 만드는 배분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만든 커다란 바탕 밑그림에 멤버들이 여러 오밀조밀함을 함께 수놓아 나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앨범의 서두를 자신감 가득한 행진으로 시작하는 곡이 있다. 제목이 뜻한 바를 검색해 보았다. <Djed> 제드는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상징 중의 하나라고 한다. 안정성을 나타내는 이 문양은 여러가지 색깔의 기둥들이 맞 붙어있는 형상인데 오시리스의 척추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원작자의 의도를 알 리가 없지만 만약 Djed가 그 상징을 은유하는 것이 맞다면 이들의 음악과도 나름 잘 맞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음악은 빨강, 파랑, 녹색, 노랑 여러 가지 색깔의 상징들이 나름의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층층이 붙어있는 형상을 취한다. 그 속은 안정적인 단단함으로 결속되어 있어 하나의 뿌리같이 느껴진다.

혹은, 음악을 듣는 와중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갑자기 구덩이로 떨어진 앨리스는 낯선 광경에 휘둥그레하는 것도 잠시, 호기심을 안고 이리저리 발걸음을 시작한다. 깜짝 놀라 달아나는 토끼를 따라 여러 방을 전전하며 만나게 되는 상징들은 편안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때론 기이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과연 이 끝없는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을 때 음악은 천천히 사그라지고 현실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21분의 시간은 상대성으로 흐르기에 때에 따라서 짧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한다.

앨범 자켓은 또 다른 느낌을 빗대어 보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곳은 고요한 울림만이 존재하는 심해인가? 뭉글뭉글하게 시간을 지탱하는 베이스는 마치 산소방울처럼 퍼져 오르며 모든 것을 반 템포 정도 느리게 만든다. 열을 맞춘 수많은 물고기 떼가 빠르게 스쳐 갈 때 친근함을 느낀 나는 그 속에서 함께 춤추고 싶다는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약간은 뿌연 시야를 뚫고 때로는 난반사된 태양이 반짝거린다. 심연으로 내려가는 동안 어두워지는 주변에 익숙해지는 사이 소리마저도 점점 어두워지고 둥그스름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것을 연상하든 청자에게 맡겨진 즐거움은 이를 취하는 이들에 따라 다르다. 원형 그대로 받아들여 새기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다른 즐거움을 가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구조적인 음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행위를 하려던 차에, 내가 이 음악을 그동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인식할 수 있었다. 내게 그간 이들의 음악은 뼛속에 원형으로 새겨져 있었다. 첫 전주가 흐르면 세포들은 눈을 뜨고 그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그 속에서 단지 헤엄만 치고 다녔다. 그 느낌이 어떤 색깔이었는지, 자세가 어떠했는지, 물의 수온이 차가웠던지 등 어떤 구체적인 형태도 그리지 않았다. 소리는 그 자체로서 내 안에서 함께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이를 글이란 질감으로 형상화해보려 할 때, 나는 음악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배영으로 자세를 바꾼 후 둥둥 떠 있어 본다. 푸른 하늘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낯설었다. 몸속에 스며든 소리를 하나씩 꺼내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름을 붙여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이질적이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내 행복한 교감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 보이고 싶어 음악이 몸단장을 시작한다.



Tortoise [Millions Now Living Will Never Die] 1996년 <Djed>

https://youtu.be/GHRB6kFIfJ0?si=8W1xnj6aTXJizW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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