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따로 또 같이’란 단어를 애정한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단어를 인지했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음악을 듣는다는 적극적인 행위를 모를 까까머리 때부터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지란지교, 마주보기, 홀로서기 뭐 그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정의해 주던 에세이류 단어들이 흥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중 유독 ‘따로 또 같이’란 단어는 내 마음속 하나의 파문을 던져 주었다. 이는 어떤 성향 같은 것이리라. 또한 알게 모르게 자라고 있었던 내 자아의 지향점을 누군가가 함축해서 표현해 주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던 개똥철학 같은 것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는 ‘나 혼자’라는 사실을 거창하게 곱씹는다거나, ‘따로’가 선행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라거나, 세상 어딘가에서 굳은 자아로 살고 있는 ‘따로’인 나와 ‘따로’인 누군가가 어느 날 ‘또 같이’ 란 단어로 조우하지 않을까 같은 막연한 상상들….
따로 또 같이.
이런 근원적인 마음들은 연애할 때도, 결혼 생활에도 지금까지 자연스레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함께 ‘마주보기’ 보단 각자가 서로의 지향점을 바라보되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풍경을 좋아했다.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우선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름드리 가로수에 감싸인 새벽길의 풍경, 하루종일 걷기만 했던 삼청동 길,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기, 커피샾 창가에 둘이 앉아 물끄러미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그런 시간들이 많았다. 물론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결혼 후에도 나 자신만을 치중한 나머지 아내가 자신의 깊이를 들여다볼 여유를 주지 못했다. 말로는 각자가 올곧이 잘 서야 한다고 종용해 놓고 그 환경은 전혀 만들어 주지 못했다. 단지, 이렇게 평생 미안해하며 살고 있지. 그래도 그 근본 지향점은 여전히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로 또 같이.
아이가 아주 어렸던 시절 자주 밤산책을 다녔었다. 특히 저녁 시간 공원을 가로질러 집 근처 무지개 마트로 주전부리를 사러 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아이는 항상 따라나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천천히 그 어두운 저녁길이 주는 정취를 걷고 또 걸었다. 5월엔 검붉은 장미가 덩굴을 이루며 흠뻑 피어난 장면도 기억나고, 여름의 풀 냄새, 가을의 귀뚜라미 소리, 겨울의 하얀 눈더미들이 기억난다. 길의 중간에는 아주 짧게 두 개로 나뉘는 갈래길이 있었는데 우리는 여기서 항상 ‘다시 만나자’ 놀이를 했다. 뻔히 얼굴이 다 보이는 일시적인 이별이었지만 우리는 ‘안녕, 다시 만나자’ 라고 손짓하며 헤어졌고, 20여 미터 지나 길이 다시 모이면 ‘다시 만났네’ 라고 웃으며 행복해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어린 딸은 아빠의 손을 놓는 시간이 있었고, 나뉘는 길에서 홀로 그 길을 걷는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각자가 다시 하나로 모이는 길에서 만났을 때 그 기쁨이 배가 되는 느낌 또한. 난 아마 은연중에 그런 지향하는 형태를 조그만 아이에게 느끼게 해 보고 싶었던 걸까.
따로 또 같이.
동남풍이 부는 어느 좋은 날이 찾아오면 술 한 덩이를 들고 찾아가는 친구가 있다. 삶의 방식이 완벽히 판이한 이다. 친구라니 당연히 닮은 꼴이 있을 리 없다. 전혀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정말 가끔씩 만났고, 만나면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행복했다. 만남이 잦지 않았으니 살아왔던 이야기나 쌓인 시간들은 끝이 없다. 회합의 시간은 진새벽을 넘기기 일쑤다. 만나 웃음 짓고, 서로의 '따로' 시간들을 반추하고, 기특하게 죽지 않고 잘 살아왔노라고 축배를 든다. 인생에서 자랑스럽게 ‘같이’ 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데 행복감이 든다.
따로 또 같이.
그리고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나는 알게 모르게 라디오나 어딘가로부터 ‘따로 또 같이’란 밴드 이름과 그들의 음악을 무심결에 들어왔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작은 지향점을 보태 주었던 ‘따로 또 같이’는 성인이 되었을 때 음악으로 돌아온다. 밴드명은 들어보았으되 앨범 자체를 진지하게 들어볼 일이 잘 없었다. 다행히 2000년대 초반 과거 한국 대중음악 아카이브를 뒤져 훌륭한 음악들을 복각해 오던 물결이 있었으며, 나는 그 수혜를 톡톡히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구하기 힘들었던 앨범 4장이 모두 복각 라이선스로 나오게 된 것은 그런 누군가의 애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따로 또 같이’는 신선한 밴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밴드명 그대로 멤버들 각자가 만들어낸 산물을 하나의 바구니에 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 앨범을 플레이해 놓으면 완벽히 취향이 다른 각자의 음악이 이어진다. 그런데 묘하게 이 풍경 속에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다른 성향을 보이는 음악들이 모였는데 듣다 보면 나름 전체적인 어울림이 있는 것이다. 이게 ‘따로’ 지만 ‘또 같이’ 모였을 때 발현되는 힘인 걸까? 나는 이들의 모든 곡들을 나름의 이유로 좋아한다.
몇 명의 음악인이 거쳐 갔지만 내게 이들은 결국 나동민, 이주원 두 명의 핵심으로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곡을 좋아하는지에 따라 당신의 취향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좀 더 친근한 텍스쳐에 여린 목소리로 부르는 나동민의 곡이 더 끌릴 수 있다. <나는 이 노래 하리오> 같은 것 말이지. 혹은, 저물녘의 풍경,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이주원의 곡에 더 매력을 느끼는 이도 있을 수 있다. 내가 그런 경우인데, 아무래도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저울추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실 ‘따로 또 같이’는 내게 이주원의 페르소나 같은 음악으로 기억된다.
선곡을 좀 더 안으로 침잠하는 이주원의 곡으로 선택해 보았다. 80년대 한국음악에서 상당히 드물게 세 곡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컨셉을 시도하고 있다. 본 곡의 인트로는 2집의 <하우가>와 동일하다. 그는 어떤 응어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4집에서 이를 다시 불러내면서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던 듯하다. 추적추적 가라앉는 빗소리는 내리고 내려 어느덧 강물을 이루어 흘러간다. 음악이 마침내 서늘한 바람소리를 지났을 때 새들은 함께 지저귀며 또 '같이' 만나게 되었음을 기뻐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얘기하듯, 그는 가을이 지나가는 한 시간의 단면을 잘라내어 어떤 마음으로 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쓸쓸함이라고 얘기할 수 없으며, 각자에게 각인되어 있는 수만 가지의 기억들을 끌어내어 줄 뿐이다.
따로 또 같이.
둘이 함께 해서 좋은 게 아니라
따로 좋은 사람들이 함께 만나서 더 좋다.
따로 또 같이 4집 (1988년)
가을의 노래
I. 여름은 가고 0:00
II. 그대를 위한 가을의 노래 3:16
III. 바람은 강물을 만났을까 7:22
https://youtu.be/45MJywaUnP8?si=3UzdjfIHjsPQxo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