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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빛깔의 빗소리들

젠틀 레인 [Into the Gentle Rain]

by Jeff Jung

도서관에 가서 ‘재즈’라고 검색해 보면 다양한 책들이 나열된다. 1900년 초 흑인 노동요로 시작하는 다소 딱딱한 역사서부터, ‘이 한 장의 앨범’ 같은 음반 위주의 추천서, ‘시네마에 깃든 재즈’와 같이 특정 테마에 집중한 책들까지. 모든 책이란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음악 듣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만약 누군가 재즈 음악을 듣기 위한 입문서를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남무성의 <재즈 잇 업>을 읽어보시라고 제안할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책은 재즈 변천사의 뿌리와 줄기를 씨줄로 두고, 거기서 파생되는 중요 뮤지션 소개를 날줄로 하여 구성을 잡았다. 즉, 지식에 필요한 전체 뼈대를 잡아내는데 기본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더불어 작가는 이 재즈의 맛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만화라는 매체를 가져왔다. 기존 책들과의 가장 큰 차별점은 여기에 있다. 우린 이미 이 매체의 파괴력을 <먼나라 이웃나라>, <Why? 시리즈> 등으로 잘 알고 있다. 역사에 약한 내가 교양 정도는 알고 있다면, 이는 만화라면 모조리 읽어치웠던 어린 기억이 남아있는 덕택일 것이다.

작가는 수많은 재즈 뮤지션들의 기행, 녹음 당시의 에피소드 등 잘 알려진 인간적인 스타일을 끌어 온 후 적당히 비틀고, 위트를 더한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중간중간 스치듯이 중요한 앨범들을 언급한다. 뚜뚭빠라뿝빠 스캣의 루이가 등장하고, 약쟁이 버드의 기행이 예상될 것이고, 몽크의 독특한 외고집, 빌의 굽은 등이 그려질 것이다. 꽃미남 쳇이 이빨이 빠진 행색으로 그려지고, 시니컬한 표정의 마일즈, 걸쭉하게 침을 뿜는 벤, 멋쟁이 신사 오스카의 수트가 보이지 않겠는가.

<재즈 잇 업>의 역사 훑어보기는 이렇게 재미적인 요소에 깊이를 더해 꽤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한 권의 컬러 만화로 정리된 역사책을 본 이후에는, 중요 앨범 50선을 소개하는 별도의 세션 <재즈 잇 업 – 만화로 보는 재즈 걸작선> 또한 재즈 공부에 전문성을 더해준다. 이 책이 이룬 가장 큰 성취는 전문성과 대중성, 그 양면의 밸런스를 적절히 맞춘 기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남무성 본인이 가진 해박한 음악 지식과, 전문 만화가가 아님에도 작화에 도전했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재즈 음악을 접근하는 편안한 가이드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그의 기여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준형은 자매품 <페인트 잇 록>을 통해 접한 밴드 음악을 들으며 기타리스트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성과 대중성, 그 밸런스의 고민은 다른 곳으로 이어진다. 그는 갓 시작하는 신생 재즈 트리오의 앨범을 프로듀싱한다. 바로 드러머 서덕원을 리더로 결성된 Gentle Rain 젠틀 레인의 데뷔 앨범이다. [Into the Gentle Rain]은 그가 보여 주었던 [재즈 잇 업]에서의 접근법을 많이 닮았다. 우선 밴드에게는 정확한 지향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재즈란 어렵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감성적인 부분을 자극하고 싶었을 것이다. 전투와 같은 인터플레이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말이야 쉽지, 이것은 사실 창작자에게 가장 어려운 지점이 아니던가. 그리고 남무성은 프로듀서로써 여기에 적지 않은 입김을 불어넣어, 앨범 전체가 치우치지 않는 지향점을 가지게 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작곡, 편곡의 역할은 밴드에게 맡겨 두되, 각각의 곡이 가지는 색채를 열 두곡이라는 흐름 속에서 큰 톤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율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흐르는 아련한 마음, 노란 가로등이 비추이는 골목, 장화 바람으로 뛰어가는 아이들, 그리운 친구에게 보내는 손 편지, 헤어진 친구가 생각나는 저녁, 맑게 갠 날의 햇살이 내비칠지도 모르겠다. 개성이 다른 곡들의 순서, 유기적인 연결 또한 그가 고민하였을 지점이다. 환기를 유도하고 싶은 중간 <찬비>를 집어넣어 휴식을 유도한다거나, 익숙한 팝송 위에서 연주가 날개를 달수 있도록 한다거나, 적절한 시점 세션을 추가하여 트리오 사운드를 확장해 보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곡들은 멜로디가 명확히 잡히는 난이도를 보이면서도 스타벅스 뮤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긴장을 끝까지 유지시키고 있다. 녹음 또한 훌륭한데, 피아노의 또르르 구르는 빗방울, 묵직하게 닦아내는 콘트라 베이스, 심벌로 흩뿌리는 잔비들이 도처에서 흐린 풍경을 만들어 준다.


젠틀 레인은 남무성의 지휘를 통해 발매한 1집으로 재즈 씬에서 호평을 받으며 데뷔하게 된다. 이후 꾸준하게 음악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되었는데 어느새 20여 년이 지났다. 매 앨범에서 이성과 감성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피 튀기는 전투씬을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에서도 최애는 아니다. 하지만 젠틀 레인이 한국의 재즈 씬에서 이루어 온 위치와 성취는 분명 인정한다. 올 3월 문득 일곱 번째 앨범 [Theme Park 테마 파크]를 발매하고 또 다른 기지개를 켜는 몸짓이 보인다. 테마 파크의 여러 놀이기구를 주제로 준비했다니 재미가 어떨지. 주변에서 공연 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재즈는 분명 정제된 앨범 버전보다 라이브가 제 맛이니 기회가 된다면 직접 자신의 입맛으로 시식해 보는 것도 좋겠다. 왠지 찰찰 되는 심벌 소리만 들어도 행복해질 것 같지 않은가.


젠틀 레인 [Into the Gentle Rain]

15분 51초 05.Stand Up!

https://youtu.be/WBt-jnIgfFQ?si=HZpC7j1Z0bgfzz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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