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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Oct 20. 2024

치매 어머니 이야기 (2), "아버지, 기억하세요?"

https://blog.naver.com/yoondy2000/222898568374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온 후


2022년 10월에 어머니를 모시고 파주에 올라와서 함께 살았다. 치매 어머니를 모시게 되어 기쁘다는 글을 읽은 독자가 '부인 입장에서도 생각해 주셔야 한다'고 우려를 표현하셨다. 그 독자분은 치매 시어머니를 모신 경험이 있는 분이었다. 치매 노모와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잠을 주무시지 않고 밤에 돌아다니시고 문밖의 계단에서 넘어져 몇 바늘 꿰매기도 하셨다. 딸의 방에 가서 속옷을 가져가서 딸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것은 배변이다. 어머니는 기저귀를 싫어하신다. 새벽에 눈을 뜨면 혼자서 뒤처리를 하느라, 지독한 냄새가 난다. 내가 화장실 청소를 다 해도 지독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여기저기 옷을 꼬불쳐 놓고, 배변이 묻은 기저귀를 숨기시기 때문이다. 자기가 뒤처리를 하려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요양원으로 가는 것을 절대 반대하시는 우리 장모님과는 달리, 어머니는 "날 시설로 보내달라"고 하셨다. 평생 호강하며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시설에서도 불편하지 않게 살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도 군대 생활이 가장 행복했다. 청소년과 대학생 생활에 비하면 군대는 호텔이었다. 대학교 실험실에서 2년 반 먹고 자고 한 것을 상상해 보면 내 말이 조금 믿길 것이다. 어머니는 난처할 때마다 아들인 나에게 속삭이듯이 "날 시설에 보내달라"고 호소하듯이 말했지만, 요양원을 싫어하는 장모님을 생각하면 아내는 아무리 힘들고 신경이 곤두서고 치매 노모와 말다툼을 할지언정 요양원을 보내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문산 가가호호 요양원, 만세!

문산 가가호호 요양시설, 만세!


어머니를 9개월 모신 후, 내가 결단을 했다.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는 길이 서로가 살 길이고, 어머니도 수도 없이 하신 말이었다. 아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불편하고 자유롭지가 못하신 것을 내가 알고 있기에 아내를 설득하여 요양원에 가시게 했다. 문산에 있는 가가호호 주간보호시설에 어머니를 보냈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시는 요양사 선생님이 친절했을 뿐 아니라, 소통이 만족스러웠다. 또한 어머니를 만나거나,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모시고 나오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이 출입할 수 있었다. 어떤 시설은 출입하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정상인과 요양원 내의 사람이 왕래하고 소통하는 것이 어렵고 자연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산에 있는 가가호호 요양원에 주간보호시설에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가 오고 가면서, 요양원과 소통하면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만일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게 된다면 어디가 좋을까, 찾고 있었으나 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종종 주간보호시설을 출퇴근하기보다, "요양원에서 자고 오면 안 되냐?"라고 나에게 수차례 요구하셨다. 요양원에 친구가 생기신 듯하다. 그러나 가가호호에 종일반에 빈자리가 없어서 기다렸다가 어머니를 장기요양으로 바꾸게 되었다. 2개월마다 치매약을 타는 일을 어머니와 함께 하고, 주일날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서 예배드린다. 나의 어머니의 경우, 내 상황의 경우, 가가호호 요양원은 너무나 고마운 동반자였다. 훈련받은 요양사들과 우리는 천지차이이다. 어머니는 치매에서 오는 증상뿐 아니라, 속이 약해서 너무 자주 배변 문제가 있어서 딸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 상태에 왔을 때, 문산의 가가호호 요양원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백지 같은 어머니, 흰눈 같은 어머니

난 몰라, 아무것도 몰라.


오늘도 어머니를 모시러 아침 9시 30분에 나갔다. 어머니를 만난다. 모든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나약한 어머니가 위대하게 보인다.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스피노자의 사상의 핵심이다. 어머니는 조실부모하고 눈칫밥을 먹고 자랐으며 자기주장을 할 줄 모르고 막내로 자랐고 구박을 받고 자라셨다. 본인이 늘 부족하게 여기고 나서지 않는다. 요령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네 아들을 낳으셨고 지금까지 살아온 자체가 위대한 일이다. 난 기억을 잃어버린 어머니에게 말은 건다. 주간에 가족에게 있었던 뉴스를 전달해 드린다. 지금은 자녀, 가족 이름을 모른다. 얼굴을 찡그리기는 하지만 평온해 보인다. 다소 혼란스러운 듯 눈을 감지만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시기만 하다.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말을 건다. 식사는 잘하신다. 교회에 오시면 80대 권사님들이 아기 챙기듯이 챙겨주시고 간식을 주면서 서로 동지애를 나눈다. 기억이나 감각이 뚜렷하신 80대 권사님들은 근육통, 신경통, 허리통증으로 팔도 들지 못하고, 안 아픈 곳이 없으신데, 나의 어머니는 40킬로 정도로 몸이 가볍다. 승합차에서 내릴 때 어른처럼 조심스럽지 않고, 폴짝 뛰어내리 듯해서 늘 조심한다. 어머니는 적어도 몸은 가볍고, "난 아픈 데가 없다"고 하셔서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다른 할머니 권사님들을 만나면, 잠을 못 자고, 팔을 들지 못하여 밥을 먹는 것이 고역이고, 몸이 쑤시다는 말을 한참 들어야 한다.


어머니, 아버지 기억나세요?

오늘 아침에 난 일부러 아버지에 대하여 물었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을 표현했었다. 아버지는 2015년에 직접 차를 몰고 심장병 정기점진을 가셨는데 그날 밤 돌아가셨다. 심장병은 순식간에 사망하는 특징이 있다. 다행히 나는 파주에서 청주로 가서 아버지의 임종(death bed)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돌려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하지만 돌려줄 수 없는 대상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이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실천> 2부 9장에서 <사랑은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2024년 12월 출판예정)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새롭게 생각해 본다. 아무튼,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힘들었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비난하는 게 힘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두 분의 관계를 판단하지 않고 그것은 두 분의 관계로 맡기고 나는 내 길을 갔었다. 


치매와 함께 아들들의 이름과 친족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도 사라졌다. 마치 백지 같이 되셨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처럼 맑으시다. 어머니는 행복이나 기쁨도 기억하지 못하시지만, 어떤 고통이나 미움이나 서운함도 없는 듯하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좋은 사람이라고 하세요. 그래야 아들 마음 좋지."


어머니는 이제 아기 같으시다. 새로 시작하신다. 천국에 가면 눈물도 없고, 상처도 없고, 미움도 없고, 고통도 없겠지. 치매 어머니의 의식의 세계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하셔서 좋다. "난 아픈 데가 없어"라고 말씀하시니 좋다. 그리고 모든 걱정, 모든 미움, 모든 회한이 사라져서 좋다. 비록 답답하신지 한숨을 종종 쉬시긴 하지만, 난 어머니가 평안하셨으면 좋겠다.


매주 주일 아침 어머니를 함께 예배드리러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모시고 오는데, 차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https://blog.naver.com/yoondy2000/223519189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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