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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Feb 20. 2022

16. 그의 PMS

나의 연하남

흔히들 갱년기라고 하면 어느 중년 여성의 부스스한 머리와 붉어진 얼굴을 떠올리고 PMS(Premenstrual Syndrome: 월경전 증후군)라고 하면 예민한 어 여자의 그날을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아주 개인적인 경험을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엄마의 갱년기보다 아버지의 갱년기가 훨씬 더 다채롭게 지나갔고 나뿐 아니라 나의 남자도 PMS를 종종 겪으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다른 남자들은 어떨까?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한겨울 주말에도 7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서 운동을 다녀오는 가 8시가 넘도록 침대에서 발가락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그 누구보다 빨리 감지하는 아이들이 생기 발랄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혹여나 아이들 둘 중 하나라도 희생양이 될까 봐 최대한 아빠의 동선과 겹치지 않도록 몰아넣는 것이, 오늘 나의 첫 업무였다.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며 2호기를 아기 의자에 묶어 내 뒤에 두었다. 아이가 지루해하자 나는 언제나 그렇듯 국자를 손에 쥐어주었는데, 남편은 아이가 국자를 휘두르는 소리조차 귀에 거슬린다고 짜증을 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1호기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빠에게 모닝 잔소리(?)를 했다가 폭풍 혼났다. 그것도 여러 번.


지난밤에 잠을 잘 못 잤나? 걱정이 되어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요즘 화이자 2차의 부작용인, 밤마다 심해지는 두드러기로 고생하고 있다. 얼마 전 집에 잠시 놀러 왔던 아이 친구의 엄마인 동네 한의사 선생님이 우연히 남편을 진맥 한 일이 있었는데 - 마침 그날 남편이 재택근무한다고 집에 있었고 허리 통증으로 고생한 지 꽤 되어서 미리 부탁했었다 - 허리는 회사나 집 근처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침 치료를 받으면 좋아지겠다고 했었다. 문제는 커다란 자동차의 기름통이 비어있는, 기력이 쇠해진 상태라고. 놀란 나는 서둘러 보약 한재 부탁했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한약도 먹이고 있는데, 흠.

 

PMS가 틀림없었다.


열여덟 살 봄에 학교 음악실에서 처음 만난 그와 돌고 돌아 대학 졸업 무렵부터 오 년을 사귀고 결혼한 지 일곱 해가 지났다.

어쩌다 보니 인생의 반을 알고 지내는 중이니 감히 '내가 좀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래, 그 날이군.


이럴 땐 대피가 상책이다.


문제는 오늘 날이 너무 춥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첫 브런치 북을 발간하며 이제 봄이 왔으니 프롤로그를 '2022년 봄'으로 수정해야지, 했다. 옆에 있던 아이들에게 '이제 봄이야'라고도 했는데.

1호기가 창 밖을 보다가 말했다. "엄마, 겨울이 가다가 다시 왔어. 늑대가 왔나 봐."


아침 먹고 난 그릇을 싱크대 안에 넣어놓고 서둘러 아이들을 씻기고 옷을 입혔다. 나는 세수만 대충 하고 모자를 눌러썼다. 코로나 시대가 열린 후 좋은 점 한 가지는, 생얼에 마스크만 잘 쓰면 된다는 것이다. 가방에 아이들 물과 과자, 기저귀를 쑤셔 넣고 차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남편이 물었다.

 

"어디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어. 자기 혼자 있는 시간이 좀 필요해 보여."

"나도 같이 가자."

"아니야. 혼자 조용히 있어. 점심 먹기 전에 올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했다. 우리가 종종 가는 용산가족공원이나 여의도공원은 너무 추울 것 같았다. 덕수궁이나 경복궁도 마찬가지. 갑자기 박물관들이 떠올랐다. 아직 마스크를 못 하는 둘째 때문에 실내로는 거의 가지 않지만, 지금은 시간이 이르니 박물관에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이 참 좋은데 사전예약을 안 해서 패스. 국립궁박물관은? 다행히 어제부터 사전 예약 없이 갈 수 있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지하의 고궁 배움터는 아직도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괜찮았다. 서둘러 경복궁 주차장에 차를 모셔놓고 매서운 바람을 뚫으며 반대편에 있는 고궁박물관으로 뛰어갔다. 한 손으로 유모차를 운전하고 한 손으로 아이 팔을 잡고.


예상대로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혹시 몰라서 기획전시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곧장 지하로 내려갔다. 과학관에 들어가서 커다란 자격루를 보았다. 운 좋게 시간이 맞아서 자격루에서 소리가 나고 인형이 바뀌는 것도 보았다. 이 커다란 것이 '시계'라고 하니 아이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해시계도 이해불가. 측우기는 그래도 좀 았다. 아이와 자격루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저렇게 거대한 시계가 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컴퓨터의 잠금화면이 될 때까지, 인류는 참 부지런히도 발전해왔구나 싶었다. 그 옆의 전시실에서는 왕의 행차나 왕실 제사와 관련된 모형이 있었다. 아이에게 가마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고 '제사'라는 것의 의미도 말해 주었다. 




아이와 박물관에 가면 맞춤형 도슨트가 되어 쉴 새 없이 떠들어야 한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말을 하다가 '아, 저 크고 무거운 가마를 들어 올리고 걸어간 가마꾼들은 무슨 죄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왕의 행차에 동원된 수많은 사람 중 가장 안타까웠다. 그들은 가장 영광스럽다고 생각했을까? 암튼 어린 시절에는 가마를 보면 그 위에 타는 공주님이 되는 상상이나 했던 것 같은데. 그래 그새 나도 많이 컸구나 싶었다. 왕실의 제사상을 설명해주다가는 문득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제임스 S. 게일/최재형 옮김]이라는 책 생각났었다. 그 책의 반부에서, 저자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관찰한 것을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시신을 자리에 둘둘 말아 그대로 익어 썩어가도록 햇볕 아래에다 방치한다. 시체 냄새가 뒤덮고 있는 이곳에 오면 누구든 곧 보통의 시체 썩는 냄새와 천연두나 콜레라로 죽은 시체에서 나는 독한 냄새를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


왜 시체를 땅에 묻지 않느냐는 그의 물음에 조선 사람들은 먼저 묏자리를 쓸 명당을 찾아야 한다고 답했다. 책의 후반부에저자는 '제사를 올리고 예를 그렇게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들의 조상은 자손들을 결국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 영적인 삶과 이승의 번영이 고갈된 이 땅이, 이제는 무의식 중에 자신의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고 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왕실의 제사에 올려진 음식과 관련된 복식 등은 우리나라 의례문화의 수준을 높여주었을 것이고, 효에 바탕한 조상 섬김은 2022년을 살아가는 나 또한 중요한 것으로 교육받았고 그렇게 인정하지만, 조선은 결국 죽은 자들이 살려주지 못했다.



어쨌든 나와 아이들은 오랜만에 박물관에서 꽤나 알찬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엘리베이터나 수유실도 잘 되어 있었기에 영유아를 동반한 방문객 입장에서는 고마웠다. 1호기는 뮤지엄 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문객이 없는 틈을 타서 쇼핑도 했다. 이제 곧 어린이집 졸업을 앞둔 아이는 '하늘반' 선생님께 선물을 하나 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이 참 예뻐서 우리는 함께 거울을 골랐다.



 

궁금한 마음 반, 걱정하는 마음 반으로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 세상에. 햇살 가득한 우리 집이 대충 보기에도 어찌나 훤한지. 그새 청소했구나, 싶었다. 남편이 슬쩍 나왔다. 여전히 뾰로통했지만 반가움에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치 숙제를 '완벽히' 해 놓고 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처럼, '착한 일'가득 해 놓고 엄마의 칭찬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처럼, 남편의 뾰로통한 얼굴이 딱 그랬다. 화장실 청소, 쓰레기 분리수거, 설거지, 심지어 반찬 그릇 정리까지 싹 다 했다. 세탁기도 돌아가고 있고 건조대에 널려있던 빨래는 차곡차곡 접혀 있다니. 나의 세 시간보다 그의 세 시간이 훨씬 더 바빴으리라.


"누워서 그냥 좀 쉬지 그랬어."

"집이 형편없잖아."

"애 키우는 집이 다 그렇지 뭐."


서둘러 밥을 안치고 국을 끓였다. 아이들과 점심을 먹을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삐져서 (ㅋㅋㅋ PMS가 확실하다) 별 말이 없었다. 식사를 끝내자 갑자기 밖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했다. 많이 춥다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그냥 두었다. 아이들 낮잠을 재우고 살금살금 나왔더니 그가 들어왔다.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들고. '먹자.'


역시 PMS구나.

3일만 봐줄게.

나의 오 개월 연하남♡

아 청소는 감동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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