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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Mar 18. 2022

한 주만 쉬겠습니다.

소설에 담는 말

"오늘 금요일이야. 초안이 없는 것 같던데 어떡해?"


매번 재미없다고 잔소리하던 뮤즈가 제 소설 연재를 걱정해줍니다.


죄송합니다.

소설 연재를 한 주만 쉬겠습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올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지난 월요일, 유치원 셔틀버스에서 내린 1호기의 목소리가 영 이상했습니다. 그날 밤부터 기침과 열이 시작되었지요. 다행히 지금까지도 코로나 자가검사키트에서 음성이 나오고 있고, 금요일쯤 되니 1호기의 컨디션은 거의 회복되었습니다만... 어젯밤부터 2호기가 38.5도 근처에서 배회합니다. 자가 키트의 정확도를 반신반의하면서도 키트를 해 보고, 음성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요즘은 감기 환자도 많습니다.'라는 소아과 선생님 말씀에 위로(?)도 받습니다만... 어쨌든 아이들은 고열에 시달리고 제 마음은 조마조마합니다.


지난 월요일, 2호기는 엄마와 놀이터에서 아주 잠시 놀았습니다. 형아들처럼 긴 미끄럼틀을 타고 싶어 했지요. 엄마와 함께 올라가서 슝~ 내려오다가 그만, 왼쪽 다리가 뒤로 접혔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울다가 금방 그쳤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서지 못했고 걷지 못했습니다. 놀라서 X-Ray를 찍어주는 소아과로 뛰어갔습니다. 다행히 이상은 없다고 했습니다. 하루나 이틀이 지나도 여전히 걷지 못하면 다시 오라고 하셨지요. 다시 갔습니다. 아이가 많이 어리니 대학병원에 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세브란스는 전화예약이 하늘의 별따기여서 강북삼성병원으로 갔습니다. 아이는 마스크를 찢으며 유모차에서 내려달라고 울었고, X-Ray를 또 찍으면서 울었고, 대기시간에 지쳐 울었습니다. 겨우겨우 친절하신 선생님을 만나서, 사실은 듣고 싶었던 말인 '괜찮네요.'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물음표는 여전합니다. 왜 못 걸을까요?


아이가 말을 못 하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한 달 정도 지켜보자고 합니다. 대학병원이 뭐라고, 아이와 저는 기진맥진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아이 열이 납니다. 부디 누나의 감기 바이러스가 온 것이기를 바랍니다. 혹여나 병원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왔을까 봐 엄마는 또 전전긍긍합니다.


둘이 좀 떨어져서 놀면 좋겠는데... 이럴땐 쓸데없이(?) 우애가 좋습니다...


저는 한주 내내 죄책감에 휩싸여있었습니다. 그날 내가 1호기의 옷을 너무 얇게 입혀서 보냈나 보다. 그날 내가 괜히 놀이터에 2호기를 데리고 가서 미끄럼틀을 탔나 보다. 혹여나 많이 아프면 어떡하지, 혹시나 아이가 못 걸으면 어떡하지 등등 말입니다. 그런 저를 보던 남편이 한마디 했습니다.


"소설에서는 '네 잘못 아니야' 이런 소리 하면서, 왜 그러고 있냐?"


제가 쓴 소설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소설에서는, 드디어 강 부장과 강 부장의 어머니께서 '한 발짝 앞으로' 나갔습니다. 붓을 다시 잡으셨고 그림도 그리셨지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며칠 전에 아버님께서 다시 구급차를 타고 중환자실로 가셨습니다. 코로나로 병원들은 아수라장입니다. 아침 일찍 구급차에 동승하셨던 어머님께서는 그날 열두 시간을 응급실에서 보내셨지요. 눈물의 한 주를 보내고 계십니다. 어머님은 어머님의 병원을 오가며, 저는 저의 병원을 오가며, 서로 가보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서로 힘든 마음을 달래며 통화만 했습니다.


저는 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소설에 섣부른 희망 회로를 써 내려갔나 등등 말입니다.


수십 번, 수백 번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글로 정제하여, 게다가 수정까지 하면서 써 내려가는 소설과 달리, 날것 그대로의 현실은 더 '드라마틱'하고 더 '다이내믹'합니다.


제가 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사실 누군가에게 정말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고, 때로는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도 했습니다만... '내가 저 말을 소설 속에서 너무 가볍게 쓴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소설 쓰기'에 도전할 줄은,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할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어찌어찌 시작한 소설 쓰기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고가의 외제차를 타며 양주만 마시고 명품만 입으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외국계 IB에 다니는 bankers들의 삶이, (불쌍한(?) 울 남편은 그렇게 못 살고 있지만) 생각과 달리 그렇지 않다는 반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지요. 그런데 제가 연애 때부터 약 10년 정도 옆에서 관찰해보니 (생각해보니 오래 일했구나 뮤즈야. 장하다.) 다들 각자의 무게가 있더라고요. '평범'하게 사는 삶은 무엇일까, '평범'한 게 가장 어렵네,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소설 속 누군가의 입을 빌려서 소리 내어볼 수 있다는 것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던 이런저런 소리를 내어보았지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더 깊게 고민하고 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애들은 계속 보채고.. 저는 참다 참다 폭발해서 결국 화를 냅니다. 저 어린것들에게, 저 아픈 것들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미안함.. 도대체 나의 바닥은 어디일까라는 좌절.. 뭐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요.


코로나에 걸린 사람과 걸릴 사람, 그 사이사이에 감기에 걸린 사람이 숨어있다는;; 그런 봄입니다.


부디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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