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의 경계 위에서
기준
왓챠, 넷플릭스, 티빙. 요즘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이 중 하나는 구독하기 있으며, 그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한 두개 정도는 봐야한다. (ex. 넷플릭스_오티스의 비밀상담소) DVD 플레이어가 있어야만 볼 수 있었던 영상들이, 고작 3번의 터치만으로 재생이 되는 시대가 온 순간부터 영상이 내 삶에서도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영상들 영화들에 쉽게 노출 되고, 그에 따라 영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기준이 어느 순간 점차 형성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상은 무엇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주 고민을 해보았다. 이번 보고서에서도 내가 최근에 본 영상 중 인상적이었던 영상을 나만의 기준으로 생각하며 곱씹어보았다.
외계의 경계 위에서
최근, 내가 본 영상 중에서 기억에 남는 영상은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이다. 비록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이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별점 5점짜리 영화이다.
우선, 한국에서 ‘외계인 세계관’ 소재가 들어가 있다는 부분이 신선했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외계인’ ‘외계 세계’를 흔하게 다루지만,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이 영화의 표면적 소재가 외계인것이지, 실제 소재가 외계는 아니다. 또한, 외계라는 표면적 소재를 활용했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에서 소외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난 보통 그런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과 같은 부류의 영화들. <플로리다 플로젝트>와 같은 영화들. 비주류의 사람들을, 중심 사회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우울감’ ‘무능함’으로만 묘사하지 않는 영화들이다. 영화가 주요 캐릭터를 바라보는 방식이 동정이 아니라는 점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도 세상을 원망하며, 상처를 갖고 있음에도 꿋꿋이 일어나고, 자신의 방식으로 고통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그의 상처를 누구와도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병구나, 마츠코, 핼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버텨’나가는 점에서 연민으로 설득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감정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 있는 타자에 대해 감독만의 시선으로 고찰 한다. 대다수의 상업 한국영화의 경우에는 비주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 ‘연민’에 호소하며 관객들에게 눈물을 갈구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달랐다. 이러한 점은 주인공인 병구의 아픔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병구의 여자친구인 순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커스 단원으로 지내며, 그녀가 타야 하는 외줄은 당장의 주어진 상황만 보고 살아가야하는 그녀의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병구와 순이의 사랑은 흔히 봐왔던 영화 속 로맨스와는 다르다. 병구는 순이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초반에는 그들이 사랑하는 연인 관계는 커녕, ‘남매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그널이 없었다. 순이의 표정과 얼굴에는 사랑스러움은 없었으며, 영화 보는 내내 웃는 표정 한 번 볼 수 없었다. 기존의 영화들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과는 명백히 달랐다. 주로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는 존재로 묘사되는 영화들과 달리, 순이가 병구를 위기 상황에서 구출해낸다. 순이에게도 그녀만의 서사와 감정이 존재한다는 점이 당시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황당한 결말이 좋았다. 대중은 언제나 행복한 결말을 외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행복한 결말이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만식 한 명이 죽는다고 주인공은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지구가 폭발해버린 지금의 엔딩이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베스트 엔딩인 듯 싶다. 혹은 지구가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 병구에게 해피엔딩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를 갖고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포와 재미를 동시에 느끼는 짜릿함 때문이다. 한 장면 한 장면 우습기도, 또 무섭기도, 가끔은 통쾌하기도하다. 그 뒤의 이 영화 엔딩은 완벽 그 자체였다. 내가 살고 있는 행성이 안드로메다가 아닐까 의심하도록 만들어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