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내뱉는 입김이 희뿌연 하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겨울이다.
걷다가 불쑥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행복감'에 나는 입을 벌려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아. 행복해"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일종의 허상이라고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행복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또 다른 삶의 고통을 불러온다며, 고통이 없는 상태 또는 최대한 고통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아 헤매며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뒤돌아보면,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신기루 같은 행복을 찾아 헤매다 오히려 절망하고 자책하며, 또 다른 삶의 고통을 만들어낸 것도 맞는 것 같다.
신기한 것은 조금 더 젊었을 때는 '행복감'이 쉽사리 차오르지 않았다. 괜찮은 직장에 입사했고, 좋은 아내를 만났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는데도, 나보다 더 나은 상황에서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나 스스로 내뱉는 잦은 불평에 둘러싸여 지냈다.
그러다 한 번씩 '나는 지금 행복한 거야'라고 자기 암시를 걸기도 했지만, 다시 끓어오르는 불평불만이 바람에 날려 꺼져가던 촛불이 다시 살아 오르는 것 같았던 '행복감'을 툭 꺼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여러 죽음을 바라보다 보니, 그저 지금의 살아 있음에, 주변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행복하다'라는 감정에 쉽게 이입되는 것 같다.
이러한 행복은 기억으로부터 기인한다는 말이 있다.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것을 일컫는 말일게다.
나는 아내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때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다. 특히 여행을 할 때 여유 있는 시간과 편안한 마음이 기반이 되어, 과거의 어려웠던 경험, 즐거웠던 경험들을 서로 다투어 펼쳐낸다. 그리고 마무리는 항상 "지내고 보니 참 행복한 날들이었어"로 지어진다.
그러하니 앞을 보며 내달리던 젊은 시절보다, 좋았던 추억은 물론이거니와 어렵고 힘들었던 경험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도배되는 노년이 '행복감'을 느끼기에 더욱 적합한 듯하다.
아내가 곁에 앉아 있다 가끔 툭 던지는 말이 있다. "이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까?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면 항상 이런 걱정이 따라오네" "무슨 그런 걱정을 해. 늘 행복하면 되지"라고 되받아 대답하지만, 사실 나도 가끔은 불쑥 떠오르는 두려움이긴 하다.
여하튼 가끔씩 떠오르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먹이 삼아 '행복'이라는 허상에 빠져 살아감도 썩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