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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카 Aug 23. 2015

31일째_폰프리아->칼보르(30Km)

까미노 데 산티아고

오늘의 뜻밖의 선물

4월의 하얀 순례길...  


순례길 위의 두 마리의 말

육체적 소모가 많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나면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에까지 감탄하게 되나 보다. 현실에서 잊고 살았던 하루 하루의 선물 같은 보석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눈이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라 탓할 수 없는 것.  다만 지금이라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배낭이 없이 걸을 때 4Km는 그저 산책길이지만 7Kg의 배낭을 메고 31일째 길에서 자야하는 순례자에게는

4Km는 버거운 거리인 것 같다.  그러나 수고를 아끼지 않고 먼 길을 돌아온 이유는 이 곳 사모스(Samos)에 16세기에 세워진 유명한 수도원이 있기 때문이다.


16세기에는 몇 백 곳의 마을과 수도원들을 관장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데 이제는 수도자들도 많이 없다고 하니 마음이 좀 씁쓸해진다.  그래도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마을에서는 변함없이 특별한 기운이 느껴진다.


프랑스 떼제도, 이탈리아 아시시도, 그리고 이곳도... 인간은 육적이지만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더욱 반가운 것은 나의 모든 감각들이 비로소 깨어나 잘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순례길의 힘이 아닐까... 


국적, 나이, 종교... 그 모든 배경들을 뛰어넘어 서로를 챙기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순례자들을 보면 우리 내면에서는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창조주가 만들어주신 원형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중소도시인 사리아까지 가려면 34Km인데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도 없고 벌써 저녁 7시가 다 되었다.  칼보르라는 작고 작은 마을 입구에 사설 알베르게에 짐을 풀기로 한다. 순례자라고는 나와 70살이 다 된 독일인 할머니  순례자뿐. 이 할머니는 순례를 위해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운동을 하며 준비했다고 한다.


나에게 또 다시 독방을 차지할 수 있다는 행운이 왔다. 샤워를 하고 미쳐 다 마르지 않은 몸을 옷에 구겨 넣지도,

코골이 소리도 듣지 않고, 긴장하지 않고 잘 수 있다는, 한마디로 편. 하. 게 서울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편하게 잤는데, 그것이 편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갖지 못한 것들에 참 아쉬워했건만 내가 가진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것. 내가 가진 것들만 알게 돼도 이미 충분하다...  순례길은 참 많은 것을  말없이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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