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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밤 Aug 02. 2023

참기름 김밥 한번 드셔보실래요?

아홉 살 인생 첫 김밥 만들기


아홉 살 딸내미는 지독한 편식쟁이다. 아기 때 이유식을 거부하여 내 속을 썩이더니 커서도 마찬가지다. 여태 녹색채소를 입에 댄 적이 없다. 그런 딸내미에게 야채를 먹이려고 시도했던 음식이 ‘김밥’이다. 상식적으로 김밥에 든 ‘야채’는 맛있다. 고소하게 볶은 당근, 비밀병기 우엉, 사르르 녹는 시금치까지 몸에도 좋고 맛도 좋다. 하지만 편식쟁이 딸내미에게 그런 술수는 통하지 않았다. 기어이 김밥 사이에 손을 넣고 하나하나 야채를 빼내는 딸을 보며 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네가 먹고 싶은 김밥은 뭔데? 이럴 거면 네가 싸 먹어!


옆구리가 터진 김밥과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야채들을 보니 화가 났다. 저 야채들 볶으려면 시간과 정성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순식간에 차갑게 변해버린 내 표정에 움찔한 딸내미는 오물오물 김밥을 먹으며 날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내가 벗어둔 비닐장갑을 끼며 한마디 한다.


“내가 김밥 싸볼래. 나도 할 수 있어.”


이내 김과 김밥말이를 양손에 하나씩 쥐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뭐를 위에 올려야 하지??”

  

에휴… 못마땅했지만 비닐장갑까지 낀 딸내미에게 그만두라고 하면 뒤집어질게 뻔했다. 요즘 들어 틈만 나면 뭐든지 해보고 싶다는 딸내미다. 청소기 돌리는 것도 내가, 설거지도 내가, 빨래 개는 것도 내가, 에어컨 켜는 것도 내가, 모두 다 내가! 그런 딸이 귀여우면서도 못내 못 미더워서 여태 선뜻 맡긴 적이 없다. 그러니 김밥 마는 것 정도는 해보라 해도 괜찮겠지.


“김밥말이를 펼치고 그 위에 김을 올려. 그리고 밥을 퍼서 끝에서부터 꾹꾹 눌러서 펴는 거야.”


뜻밖의 기회가 주어진 딸내미는 입술을 다물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밥을 꾹꾹 펴내는 본새가 어설펐지만 아이의 첫 김밥말이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계속 올라오는 잔소리를 밀어내고 조용히 김밥을 마는 딸내미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열심히 밥을 펴내던 아이는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속재료로 치즈, 계란, 햄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게 다 올린 거야? 더 올리고 싶은 재료는 없어?”


딸내미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능숙하게 김을 말기 시작했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꾹꾹 있는 힘을 다해 김을 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지하다. 야채를 넣지 않은 것은 괘씸했지만 김밥은 생각보다 잘 만들어질 것 같다.


있는 힘껏 김밥을 말던 아이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엄마, 참기름은 더 없어? 나 참기름 많이 바르고 싶은데.”


“김밥 자를 때 발라줄 거야. 밥에도 이미 참기름이 들어가 있고. 그래도 부족해?”


야채도 없이 맹맹한 김밥에 참기름까지 범벅일 생각이라니. 딸내미는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나는 아이의 생애 첫 김밥을 건네받아 쓱쓱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얼마나 꾹꾹 싼 건지 끝부분에 밥이 부족했음에도 쉽사리 터지지 않았다. 아, 야채만 들어 있었다면 완벽한 김밥이었을 텐데.


김밥을 건네받은 아이는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여기 있다!”


작은 그릇을 가져다 참기름을 잔뜩 쏟아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치즈, 계란, 햄만 들어가 있는 고집스러운 딸내미의 김밥.


“저의 첫 번째 김밥을 먹겠습니다. 바로 참기름 김밥입니다! 이렇게 참기름에 찍어 먹습니다.”


“??”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릴 새도 없이 김밥을 참기름에 푹 찍어 한입에 쏙 넣었다. 오물거리는 딸내미의 볼이 얄밉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홉 살 딸내미의 첫 번째 김밥은 성공인 것 같다.


그리고 당분간 야채는 더욱 안 먹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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