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과 욕심 아래에서
나는 2015년 9월 밤이언니가 되었다. 비 오는 날 저녁 밤이를 데려오는 순간, 밤이언니가 되었다. 제대로 말하면 밤이언니가 된 것은 아니다. 본 적도 없는 강아지가 밤이로 남게 된 것은 내가 욕심을 품은 순간들로부터 였다.
남편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강아지를 불쑥 집으로 데려와서 '코가 밤모양'을 닮았으니, 이름은 밤이로 하자고 했던 순간, 어디선가 밤이를 찾고 있을 가족을 기다리면서도 그 가족이 없었으면 하던 순간, 유기동물 공고기간이 종료되고 밤이언니를 자처한 순간...
이 모든 순간들이 당시에는 운명이라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비 오는 날 저녁 밤이가 나에게 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밤이는 나에게 욕심이었다. 밤이를 내가 보호하겠다고 데려왔고, 공고기간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렸다가 밤이라는 이름을 지어 내 손으로 입양 신청을 했다.
계속해서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면 될 일인데, 나는 왜 지금에 와서야 욕심 운운하고 있는 걸까? 이러한 생각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지금 밤이가 행복한 것인지 모르겠고, 또 알 수가 없다. 밤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밤이언니를 자처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밤이가 밤이가 되고, 내가 밤이언니가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욕심인 것이다. 그리고 밤이와 나의 관계를 그저 운명이라 하면 밤이 입장에서는 어떤 무력함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또 하나는 밤이와 나의 관계를 운명으로 설명하자니, 그 운명이라는 말로 너무 많은 현실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는 가족의 손을 놓쳤거나, 가족에게 버림 받았거나 그 이유가 어떻든 유기되었다. 유기동물이 새로운 가족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면서도 동시에 슬픈 일이기도 하다. 이렇기 때문에 밤이와 나의 관계, 내가 밤이언니라는 것은 운명 보다도 욕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밤이와 나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대부분이 운명 보다도 욕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욕심이라 하면 부정적으로 느끼기 쉽다. 하지만 욕심이라고 모두 다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나의 경우에는 적절한 욕심이 좋은 일이 되어 돌아오고, 과한 욕심은 실패 또는 반성의 경험으로 돌아왔었다.
이제는 밤이언니라는 이름으로 욕심을 내서 글을 써보려 한다. 글 쓰는데 무슨 욕심이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품고 있던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것 자체가 나를 돌아보려는 적절한 욕심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나의 욕심이 좋은 일이 되어 돌아올 것인지, 아니면 실패나 반성의 경험으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해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우선 오늘의 생각을 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