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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언니 Jan 07. 2024

EP.5 파고드는 편안함과 잠깐의 현실도피, 모르핀

할 수 있는 약물 치료는 모두 마쳤다. 그래도 암세포는 내 몸에 남았고, 계획에 없던 조혈모세포이식을 받게 되었다. 무균실에서 생활은 기억에 없다. 잊고 싶어 잊은 것이 아니라, 통증으로 씨름한 것 외에는 별 다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 몸에 없던 새로운 세포를 집어넣었다. 생착 후에 백혈구를 제대로 잘 만들어내야 한다. 때를 보고 백혈구 수치가 어느 정도 오르면 무균실 탈출이다. 


무균실 탈출 이후에 암병동을 벗어나 집으로 가는 과정은 지난했다. 퇴원하고 싶은 나를 그 누가 붙잡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백혈구 수치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내가 퇴원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마약성 진통제 중독이었다. 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마약 중독이라는 짧고 강렬한 글자를 그대로 쓰지 못하고, '진통제'라는 말로 꾸미려 들고 있다. 왜 이럴까? 


딱히 배고프지 않은데, 치솟는 스트레스를 주체 못 하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 봤는가? 정신 차렸을 때는 널브러져 있는 일회용 용기와 핸드폰 속 지출 내역만이 내 앞에 있다. 기분은 당연히 더럽다. 병원에서 마약 중독도 마찬가지다. 물론, 처음에는 이식 후 손바닥 작열감으로 고통스러울 때 모르핀 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맞고는 작열감을 잊고 푹 잤다. 주사로 인해 사라진 것은 작열감뿐만이 아니었다. 투병, 그러니까 내가 지금 암에 걸려 병원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잊혔다. 그렇게 모르핀은 나에게 통증을 잊게끔 하여 편안함을 안겨줬고 동시에 잠깐의 현실도피를 안겨줬다.


무균실 밖을 나와서는 손바닥 작열감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해서 모르핀을 요청했다. 한 번은 허리가 아파서, 또 다른 때는 다리가 아파서. 딱히 아픈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병원이 아닌 잠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계속해서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모르핀과 나의 동행은 얼마 못 가서 끝났다. 경험 많은 주치의는 발 빠르게 진통제를 모르핀이 아닌 다른 약으로 바꿨다. 그리고 회진 시간에 나에게 엄포했다. '이제 모르핀 없습니다. 환자분(이때 처음으로 환자분이라고 했다. 원래는 이름에 존칭을 붙여줬었다.)은 지금 마약 중독 상태입니다. 아픈 곳이 있으면 다른 진통제를 드릴게요. 그리고 지금의 중독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집에 못 갑니다.'


누구보다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던 나에게 퇴원 불허 통보는 큰 충격이 되었을까? 그렇지 못했다.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밤이가 보고 싶다 하면서 일정 시간만 되면 진통제를 요청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이식까지 다 받은 마당에 마약에 중독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독의 심각성은 그 누구도 몰랐다. 오직 나만이 중독의 원인과 정도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모르핀을 한 대 맞으면 발끝이 찌릿하며 온몸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잠깐 잠에 든다. 모르핀 없이 잠드는 과정은 복잡하다. 온갖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을 내쫓는 과정에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저 멀리 버려두었던 것들이 몰려온다. 하나둘씩 몰려와서는 따져 묻는다. 물음에 답할 방법을 찾다 보면 어렵게 잠이 든다. 그런데 모르핀은 나와 현실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리고, 그 어떤 물음도 없다. 그렇다. 문제는 모르핀이 아니었다. 투병하는 동안 암에 걸린 현실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은 것, 그것이 내 문제였다.


나는 선택했다. 힘들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이 고비를 넘어야겠다고, 그리고 지금부터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직면해 보겠다고. 몰려와 따져 묻는 것들에 대해 모두 답 해보겠다고. 최근 TV에 마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그 당시 내 모습이 떠오른다. 병실에 누워 아프지 않은 곳을 아프다고 말하며 모르핀을 기대하는 그 모습. 현실의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어떤 답도 해낼 힘이 없는 그 모습. 어쩌면 마약 중독은 육체적 통증과 현실이라는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선택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중독의 정도와 기간이 짧아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마약성 진통제 오남용으로 인해 사람들이 질병이 아닌 마약 중독으로 사망에 이르고 있다 한다. 그러나 한편, 마약성 진통제는 암병동에서 큰 고통을 느끼는 환자와 호스피스에서 완화의료를 위해서 필요하기도 하다. 문제는 약물오남용이다. 아프지 않지만 마약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어떠한 상황과 기분 그리고 사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니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애초에 벗어나려고 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시작하길 바란다.





*이 글을 보고, 다음 글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남깁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 투병기는 매주 주말 밤마다 작성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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