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언니 Dec 24. 2023

EP.4 누가 병실에서 논문을 써요?

석사 논문을 마치고 학위를 받은 지 4개월째가 되던 12월,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 받았다. 그 당시에 나는 호기롭게 '나도 이제 석사 학위를 받았으니, 무언가 해야지!' 다짐하며 작은 사무실을 얻어 연구소를 차렸다. 나의 첫 연구소는 1.5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다. 책상 하나에 의자 두 개 그리고 프린터기뿐이었다. 창문이 없어 해지는 줄 모르고 혼자서 하고 싶은 연구나 교육을 준비했다.


지방에서 작지만, 알찬 연구소를 만들고 싶은 열정으로 뜨끈한 나날을 보내던 겨울에 어지럼증이 심해 내과에 방문했다. 피검사 후 내 몸에 피가 반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지난날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결혼도 남보다 빨리했고, 퇴사와 대학원 진학도 남보다 빨랐다. 빨라서 부작용이 생긴 걸까? 백혈병 진단을 받고, 한동안은 주변 사람들의 위로를 듣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위로의 말 중 발끝을 찌릿하게 만들고, 눈을 감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 거 아니야?'


뭐든 시작하면 후회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석사과정 내내 열심히 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서, 항상 내가 편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했다. 거기에 더해 지도교수에게 혼이 많이 났다. 논문을 쓰는 내내 글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아니, 학부 때는 글을 잘 쓴다고 칭찬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대학원에서는 왜 이럴까 생각을 항상 했다(지금 석사 때 쓴 글을 읽어보면 정말 볼품이 없어 귀여울 지경이다. 하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꾸역꾸역 쓴 논문을 갖고 지도교수 눈치를 살피는 시간이 꽤 흘러, 남들보다 늦게 졸업했다.


백혈병 치료를 위해 입원한 대학병원에서 지도교수 못지않은 사람이 주치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주치의는 전문가의 의미를 나에게 일깨워준 존재다. 하루 두 번 회진으로 모자라서 설날 연휴나 공휴일에도 꼬박꼬박 회진을 나온다. 대학병원 의사들의 진료는 3분 컷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바쁠 텐데 싶어, 보다못해 환자인 내가 물어봤다. '교수님, 바쁘시지 않아요? 어떻게 회진을 이렇게 자주 오세요?' 돌아오는 답은 환자인 내가 생각도 못 한 대답. '암 병동이잖아요. 제가 안 오거나, 뜸하면 환자들이 더 불안하잖아요.'


이 주치의는 성실함을 넘어서는 회진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개인적 특성이나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대화도 기가 막혔다. 같은 병실에서 교회를 다니는 할머니가 계셨었다. 주치의는 할머니의 상태에 따라, 하루는 더 나아지게 해달라고 또 다른 날은 천국 가게 해달라고 요청에 따라 기도를 해준다. 뿐만 아니라 전날 환자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기억한 뒤에 다음 회진에서 대화 주제로 선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떠했을까?


주치의는 내가 석사 학위를 받고, 전문대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다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병실에서 시간 많은데 논문을 하나 써봐라.'고 내 상태가 좋을 때면 계속해서 이야기를 걸어왔다. 처음에는 '하하... 네 그래볼까요.'하고서 속으로 '저 논문 쓰다가 죽을 뻔 한거 같은데요...'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논문을 쓰고 있냐는 물음은 계속 되었다. 이 물음이 농익어 논문 주제를 정해주는 상황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그 당시에는 병실에서 다시 공부를 했다가는 항암 약빨이 잘 받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치의의 집요한 물음에 나는 병실에서 책을 읽고, 논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허허. 그 이후로는 책이나 논문을 읽고 있으면 주치의는 내용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글을 쓰면서 지도교수와 주치의가 동일한 선상에서 타자(학생과 환자)를 대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지도교수는 내가 쓴 문장들을 보며 주제에 대한 이해 정도와 집중력을 읽어내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주치의는 병실에서 나를 관찰하여, 내가 조금 더 의지를 갖고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이었다. 뭐, 둘 다 대학 교수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들은 타자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유심히 관찰하여 그 상황에 성심성의껏 뛰어들어 손을 잡아끄는 사람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학업을 수행한 대학원과 치료를 위해 장기간 있었던 대학병원에서 그야말로 '인복'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관계에 대한 고찰 없이 주어지는 사랑은 언제나 찰나기에 그 당시에는 몰랐다는 것이 아쉽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은지 4년이 다되어가는 지금, 나는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다. 항암치료를 하며 오심과 고열이 심할 때를 빼고는 항상 책을 봤다. 그리고 전공 관련된 논문을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꼭 이런 논문을 써봐야지.' 다짐했고, 올해는 쓰고 싶던 논문 두 편을 투고했다. 꿈만 같은 올해, 다행스럽게 병원과 멀어져 혈액종양내과 외래를 두 번 간 것이 전부다. 더불어 상처라 생각했던 것들이 변화의 순간이 되어 지도교수를 바꾸었고, 세부 전공도 정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지도교수와 주치의 모두 나와 멀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병실에서도 꿈을 품고, 포기하지 않게끔 해준 고마운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투병기를 정기적으로 쓰겠다 해놓고 그러지 못해 매주 마음이 불편했다.

병실에 있을 당시 투병기가 중간에 끊기는 것만큼 불안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기적으로 읽고 있는지 알수없지만, 꼬박꼬박 쓰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더 약속해본다. 나는 아직 살아있으니, 매주 한 번씩 꼭 글을 쓰겠다고.


*이 글을 보고, 다음 글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남깁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 투병기는 매주 토요일 밤마다 작성할 예정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EP.3 오인실과 주말드라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