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쇼핑몰 사업 확장으로 손실이 컸다. 공격적인 사업 투자와 독단적인 판단으로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첫 번째 사업 실패 때보다 더 힘들었다.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했기에 취업사이트와 지역정보지에 올라온 채용공고에 응시했다. 이력서를 제출한 만큼 연락이 왔으며 좋았겠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조급함이 밀려왔고 자신감은 점차 떨어졌다. “이토록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인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쯤 소방설비 업체에서 연락받았다.
군대에서 군수 업무를 할 때 취득한 ‘소방안전관리자 2급’ 자격증 덕분이었는지 소방설비 보조로 면접 기회를 얻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한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면접 시 소장님께서 “무경력자라 보수가 많지 않은데, 괜찮겠느냐?”며 질문하셨다. 난 조금의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다”라고 답변하였다. 업무시간 외에 투잡, 쓰리잡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고정급을 받는 직장이 우선 필요했다.
다행히 면접에 합격하여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보조 일이라 자재 운반이 주된 일이었고 어깨에는 항상 사다리를 메고 다녔다. 소장님 뒤를 따라다니며 보수가 필요한 위치에 소장님이 멈춰 서면 사다리를 펴고 자재를 전달해 주는 단순한 일이었다.
일은 금방 적응할 수 있었지만, 틈만 나면 머릿속에서는 이번 달, 다음 달 나가야 하는 대출금부터 생활비까지 숫자만 떠올랐다. 200만 원 조금 넘는 급여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이 끝나면 배달알바 또는 대리운전으로 부족한 금액을 맞춰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설상가상으로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법원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가압류통지서가 왔다는 것이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아내를 진정시키고, 일이 끝남과 동시에 집으로 달려갔다. 우편물을 열어보니 대출금이 연체되어 전셋집 보증금을 압류한다는 통지서였다. 힘든 일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집주인에게도 동일한 우편물이 발송되어 현재 상황을 묻는 연락을 받았다.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장면이 현실에서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지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수습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까운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가 상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연체 후 90일이 지나야 채무조정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90일 동안 채무자들에게 가족들이 고통받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전셋집을 빼서 월셋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전셋집 보증금은 빚을 갚는 데 모두 썼다. 문제는 월세 보증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돈 빌리는 전화를 하는 것이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이때 처음 알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용기를 내어 군 선배에게 연락했다. 선배도 어려운 상황이긴 마찬가지였지만 후배의 어려움을 모르는 체하지 않았다. 덕분에 1천만 원 보증금을 마련하고 월셋집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은 100m도 안 되는 아파트에서 통학하다가 버스를 타고, 통학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가장으로서 한 없이 미안했다. 전역한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지만, 이때는 스스로 자책했다. “무슨 때 돈을 번다고 전역을 해서 가족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하면 더 밑으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멘탈을 잡아야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빈 종이에 현재의 채무와 소득을 적었다. 다달이 나가는 대출금과 생활비 등을 고려했을 때 현재의 직장으로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내가 직장에 취직하여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했기에 소득을 높여야 했다. 소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퇴사를 결정했다. 소장님도 별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말씀하셨다.
그 길로 영업직에 뛰어들었다. 부동산에 취직해 중개보조인으로 일했다. 손님들을 모시고 집을 보여주고 계약 진행을 돕는 일이었다. 계약서 작성은 공인중개사인 대표님 소관이었기에 내 역할인 매물 안내에 포커스를 맞췄다. 손님에게 정확하고 구체적인 브리핑을 위해서는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랐다.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소방설비 보조 일을 할 때보다 몇 배의 수입을 얻기도 했다.
이외에도 애플리케이션 가입 영업, 배달요식업 관리 등을 경험하였는데, 주위에서 자주 듣던 말이 있다. “하나만 열심히 하라”라는 말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매 순간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하는 일이 돈벌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빨리 판단하고 대비해야 했기에 짧게는 한 달 만에 이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저 먹고사는 일에만 충실했다.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그만큼 세상을 보는 눈과 경험을 얻었다. 그리고 여러 영업직을 경험하면서 노하우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고 안정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