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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브 Mar 05. 2024

시대를 요란히 버텨온 삶들

애플티비  「파친코」

  ‘노인을 공경합시다’ 라는 상투적인 말을 예전엔 듣기라도 했으나 요즘같이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사회에선 좀처럼 듣기 힘들다. 오히려 노년층을 향한 비아냥만 가득하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스치며 지나가는 수많은 노인들이 이 격동의 대한민국을 열렬히 버텨온 삶을 품고 있다는 것을

 선자도 그러하다. 선자는 조선인 그리고 여성으로 그 시대를 버텨낸다. 아버지 어머니가 물려주신 강인함과 총명함은 시대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그 힘을 바탕으로 선자는 살면서 수만 번의 선택을 하게 된다. 한수와의 사랑, 이삭과의 결혼, 일본으로의 이민, 노아와 모자수의 탄생, 김치 장사 등 선자에겐 망설일 시간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묵묵히 버텨왔을 뿐이다. 그때는 모두 그랬기 때문이다. 그게 당연했다.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은 승진을 위해 이른바 알박기를 하고 있는 땅 주인 금자를 설득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같은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 설득이 쉬울 것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솔로몬은 그녀의 환심을 사야 함에도 매번 실패해 왔다. 선자만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다. 비록 그녀의 선택을 응원하지 못하더라도.


 경희언니가 죽고 선자는 큰 결심을 한다. 부산, 자신의 고향에 가겠다고. 선자에겐 비행기표를 살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고향을 매번 그리워했지만 가지 못했다.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고향에 가면 고향을 고향이라 느끼지 못해 고향을 영영 잃게 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모자수와 부산을 찾은 선자는 시장을 찾는다. 어릴 때 기억과 많이 변했지만 한국의 언어로 한국의 물건을 한국의 사람들이 사고파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 묫자리에 가보지만 역시 그곳엔 이미 집들이 들어섰고 선자는 예상했던 모습에 좌절한다. 모자수와 함께 근처 동사무소에 찾아가 묘 이장에 대해 물어본다. 그러다 우연히 아버지의 묘를 관리해주고 있던 과거의 인연과 재회한다.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마주한 선자와 복희.

헤어질 때의 그들은 어렸고 순진했고 서로 앞날의 순탄함을 바랐지만 지금 마주한 그들은 나이가 들었고 많은 순간을 겪었고 서로의 수고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게 됐다


 선자는 복희의 이야기를 듣는다. 복희와 동희는 하숙집 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자신들을 내치지 않는 양진에게 고마워하다 만주 공장에 사람을 구한다해 가게 된다. 그렇게 일하러 간 수많은 여성들은 견디기 힘든 인격모독, 정신적 살인을 경험하게 되었고 복희와 동희도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둘은 겨우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동희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자는 복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은 끔찍한 시간을 잘 견뎌내고 살아줘서 고맙다는 토닥임이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가늠하지 못할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분명 존재한다.


 이들의 삶은 멀리서 봤을 땐 묵묵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가까이서 찬찬히 들여다보면 누구보다 요란으며 요란함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킨 당신의 삶에 존경을 표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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