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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贈弟穆十八(증제목십팔)

금삿갓의 漢詩工夫(251116)

by 금삿갓

贈弟穆十八(증제목십팔) / 목씨 가문의 18번째 아우에게 주다.

- 王維(왕유)


與君靑眼客

여군청안객

●○○●●

청안객인 그대와 더불어


共有白雲心

공유백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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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 같은 마음 함께했지.


不向東山去

불향동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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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을 향해 가지를 못하니


日令春草深

일령춘호심

●○○●◎

날로 봄풀만 무성하겠네.

此(차)는 贈詩於穆十八者也(증시어목십팔자야)라. 與人交接(여인교접)에 白眼者(백안자)는 踈也고야)요. 靑眼者(청안자)는 親也(친야)라. 與君(여군)으로 靑眼者(청안자)는 親密之情也(친밀지정야)니. 兩人之心(양인지심)이 均同無異(균동무이)하야. 去其紅塵之世(거기홍진지세)하고 向其白雲之山(향기백운지산)이 已久而東山泉石(이구이동산천석)에 尙不歸去(상불귀거)하야. 光陰(광음)이 如流(여류)하야, 春草漸長(춘초점장)에 日以深翳(일이심예)하니 可歎歸隱之行(가탄귀은지행)이 今已晩也(금이만야)로다.

이 시는 목씨의 십팔(穆十八) 번째 사람에게 시를 준 것이다. 사람과 더불어 사귈 때에 백안자 즉 흰 눈동자라는 것은 소원히 하는 것이고, 청안자 즉 푸른 눈동자라는 것은 친근히 하는 것이다. 그대와 더불어 푸른 눈동자라는 것은 친밀한 정이니, 두 사람의 마음이 똑같아 다를 것이 없어서 번거로운 속된 세상을 떠나서 저 흰 구름이 낀 산으로 향하자고 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동산(東山)의 천석(泉石)에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봄풀이 점점 자라나 날마다 깊이 그늘지니, 돌아가 은거하자는 행동이 너무 늦었음이 한탄스럽다는 것이다.

* 弟穆(제목) : 왕유의 동생뻘 되는 목씨 지인, 생년 미상. 제목이 중국 자료에는 <弟穆(제목)>이 아니고 <韋穆(위목)>으로 되어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확인 불가이다.

* 靑眼客(청안객) : 백안(白眼)의 반대말. 진(晋)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고사 에서 나온 말이다. 그의 성품이 예교(禮敎)에 구속을 받지 않아 마음에 맞는 사람을 보면 푸른 눈(靑眼) 이 되고 예속(禮俗)을 지켜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보면 눈동자가 뒤집혀 흰 눈(白眼)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모친상(母親喪)을 당했을 때 예속을 지키는 혜희(嵇喜)가 찾아와서 조문하니 백안으로 대하므로, 혜희가 좋아하지 않고 물러 나왔는데, 그의 아우 혜강(嵇康)이 그 말을 듣자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가자 크게 기뻐하여 청안(靑眼)으로 혜강을 맞았다고 한다. 그 뒤로 청안시(靑眼視)는 반가운 사람을 기쁘게 맞이한다는 말로 쓰이고, 백안시(白眼視)는 그 반대의 말로 쓰인다.

* 白雲心(백운심) : 세상을 피하는 은둔의 마음. 남조(南朝)의 도홍경(陶弘景)의 《조문산중하소유부시이답(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에 "산중하소유(山中何所有) /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 嶺上多白雲(영상다백운) / 고개 위에는 흰 구름이 많다네. 只可自怡悦(지가자이열) / 그저 스스로 기뻐할 뿐이지. 不堪持寄君(불감지기군) / 감히 그대에게 보내지는 못하오."

* 東山(동산) : 동진(東晋) 때의 안석(安石)이 은거하던 곳을 말함. 현재의 저장성 사오싱시 상위구 남서쪽이다. 이 말이 시에서 은거지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안석은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사안(謝安)의 자(字)이다. 그가 처음에는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서 고와(高臥)하여 나라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자,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석이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 장차 백성을 어찌해야 하느냐<安石不肯出(안석불긍출) 將如蒼生何(장여창생하)>"라고 하면서 그가 출사 하기를 염원했던 것을 말한다. 그는 마침내 환온(桓溫)의 부름에 나아가 재상이 되었다.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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