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0년 한양의 남촌 마을에 대대로 역관 집안에 아들 하나가 태어났다. 아버지 이덕방(李德芳)도 물론 역관이지만 역과(譯科)에 등과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의 조상들이 역관이라서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로 역관 활동을 했다. 어머니도 역과에 급제하여 중국어 역관을 한 이기흥(李箕興)의 딸이다. 과거(科擧)에 한이 맺혔던 그의 아버지 이덕방은 문장이 뛰어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관제묘(關帝廟)에 빌었는데 효험이 있었는지 이 날 이언진(李彦瑱)이 태어난 것이다. 이언진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뒤에 사역원에서 공부했다. 그는 자라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조카인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한번 책을 잡으면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한 번은 어른들이 어린 이언진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이냐?" "세상의 모든 이치가 책에 있는데,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며, 오히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네가 공부를 아무리 한다 한들 역관이 아니더냐?"라고 골려도, "역관이라도 상관없습니다."라며 사람들이 비웃어도 계속 공부했다. 그는 책을 읽는 게 부족하면 내용을 전부 베껴 적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언진을 공붓벌레라고 불렀다. 글을 베낄 때는 잠깐 동안에 십여 면(面)을 쓰는데도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일절 없었다.
<압물판사전 한학주부 종6품 이언진 자 우상 호 담환 혹 운아 혹 탄등자 계림인 경신생 이십오 >
대부분 역관은 오늘날의 보따리 장사 같은 밀무역을 병행해서 가산(家産)이 넉넉했지만, 이언진의 집은 가난했다. 그는 책을 살 돈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빌려 읽는 일이 많았다. 보고 싶은 책을 빌리면 소매 속에 넣어 오가는 길에 읽었다. 책 읽기에 너무 열중하여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치기도 하고, 수레나 말이 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런 이언진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속으로 "이 아이는 총기가 뛰어나 더 이상 내가 가르칠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재야의 명문장이었던 혜환(惠寰) 이용휴에게 데리고 가서 글을 배우게 했다. 이용휴의 숙부가 이익이고, 아들인 이가환(李家煥)은 이언진보다 2살 아래이다. 생원시만 입격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이미 명성이 높아 그를 따르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강세황(姜世晃)·최북(崔北)·김홍도(金弘道) 등과 교류했다. 이용휴는 어린 이언진이 얼마나 학문을 했는지 시험해 보고는 감탄했다. 이용휴는 이언진에게 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스승님은 짝을 찾기 어려운 문장가로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는 이용휴에게 열심히 시를 배우면서 마음으로부터 존경했다. 이용휴도 '어린아이가 이 정도의 학문을 갖고 있으니 장차 크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언진은 이용휴에게 가르침을 받아 시에서도 일가를 이룰 정도가 되었다. 이덕무(李德懋)가 『청장관전서(靑蔣館全書)』 <청비록 3(淸脾錄三)>에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혜환은 비루(鄙陋)함을 말끔히 씻어내고 별도로 영이(靈異)함을 갖추어 고금을 꿰뚫어 보며 눈망울이 달처럼 밝아, 그의 안목으로는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도 글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다 할 정도였는데, 이우상(虞裳, 이언진의 자字)만은 마음속으로 깊이 인정할 만하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재기가 빠르고 넘쳐나, 서서 만언(萬言)을 짓고 누워서 천언(千言)을 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언진의 재능이 어떠합니까?"라고 이용휴에게 물었다. 이용휴가 문득 손바닥으로 벽을 만지며 말했단다. "壁豈可步涉(벽기가보섭) / 벽을 어떻게 걷거나 건널 수 있겠는가? 虞裳猶壁也(우상유벽야) / 우상 즉 이언진은 벽과 같다." 우상(虞裳)은 그의 자(字)이고, 호는 운아(雲我)·송목관(松穆館)·창기(滄起)·담환(曇寰)·해탕(蟹蕩)·탄등자(誕登子) 등 여러 가지를 썼다. 또 스스로 지은 다른 이름은 상조(湘藻)이다. 이언진은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의 시는 평범한 작품이 없고 모두 걸작이었다. 이언진은 자라면서 자신의 신분이 중인(中人)에 지나지 않아 문과는 볼 수도 없고, 사대부들과 신분을 같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벼슬을 할 수 없다면 학문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라는 회의감이 커져갔다. 그래서 이언진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으나, 그는 사람들과는 사귀길 꺼려했다. 이용휴는 훗날 요절(夭折)한 이언진의 문집에 서문을 쓰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언진은 이러한 도에 있어서 뛰어난 지식과 오묘한 생각으로 먹(墨)을 금(金)같이 아끼고 글귀 다듬기를 단약(丹藥)같이 하여 종이에 붓을 대기만 하면 전할 만한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세상에 알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에게 이기기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이겨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 나에게만 보여주고는 도리어 상자에 넣어둘 뿐이었다.” 이언진은 이용휴에게 글을 배운 뒤에 역과에 급제하여 역관이 되었다.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이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장씩 쓰고는 했다. 이언진이 역관밖에 될 수 없는 신분 때문에 항상 침울해할 때, 이용휴는 이런 말로 이언진을 위로했다. 사대부 품계(品階)란 아침에 1품까지 이르더라도 저녁에 평민이 될 수도 있고, 재물도 만금(萬金)이 되더라도 저녁에 잃게 되면 아침에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인재자(文人才子)가 습득한 지식은 한 번 소유한 뒤에는 비록 조물주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참다운 소유다. 너는 이미 이러한 것을 소유하였으니, 그 나머지 구구한 것들은 모두 씻어버리고 가슴속에 두지 말아야 옳을 것이라고 했다.
이언진이 활동하던 시대는 영조 말엽이었다. 아직도 조선은 사대부들의 세상이었고, 당쟁이 치열했다. 조선 후기 정치를 주도했던 노론은 조금이라도 주자의 주장과 다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성호 이익, 혜환 이용휴라는 거목의 그늘에서 학문이 뛰어나 천재로 불리는 이언진이었지만, 자신의 출신성분이나 양명학과 실학의 좌파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포부를 세상에 펼 수 없었다. 현실 사회의 불평등은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남긴 저술만이 세월이 흐른 후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는 믿음과 자부심을 은근히 토로하는 그런 심정으로 그는 이런 시를 짓곤 했다.
癡獃朽聰明朽(치애후총명후) / 어리석은 자도 썩고 총명한 자도 썩으니
土不揀某某某(토불간모모모) / 흙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네.
兎園冊若干卷(토원책약간권) / 나의 시답잖은 책(토원책) 몇 권만이
吾證吾千載後(오증오천재후) / 나의 천년 뒤를 증명하리.
그는 여기서 자기의 글을 토원책(兎園冊)이라고 짐짓 겸양을 했다. 토원(兎園)은 전한(前漢) 시대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인 양효광(梁孝王)의 정원인데, 그곳 장서각의 책들이 대부분 모두 속어로 쓰인 데서 유래한 말로, 자신이 쓴 책을 낮추어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시를 지어 자신의 재능에 강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이 시에서 천재의 오만함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는 물론 어느 시대든 간에 이처럼 시대를 조롱하거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 큰소리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이것으로 그의 자부심을 알만하다.
天人眼目寄吾身(천인안목기오신) / 천인의 안목이 내 몸에 붙었으니
祕冊靈文辨贋眞(비책령문변안진) / 비책과 신령한 글로 참과 거짓을 가리네.
起一函三眞快事(기일함삼진쾌사) / 하나로 셋을 포함하니 참으로 통쾌한 일
自開門戶作家新(자개문호작가신) / 스스로 문호를 열고 새로운 일가를 만드네.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쇼군으로 즉위해 있었다. 그는 재정을 비축하고 궁궐과 선박을 정비했다. 이어 일본의 각 지방에서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검술에 뛰어난 무사들과 기이한 기예를 갖고 있는 사람이나 서화나 문학에 재능이 있는 인사들이 속속 도읍으로 몰려들었다.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인재들을 에도(江戶 : 지금의 동경)에 집결시켜 훈련시킨 뒤 조선에 과시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은 정사에 조엄(趙曮), 부사에 이인배(李仁培), 종사관에 김상익(金相翊)을 통신사로 보내기는 하되,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고 3품 이하의 문관을 엄선하여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보내게 되었다. 통신사를 보좌하는 이들도 모두 문장이 뛰어났다. 천문, 지리, 산수, 복서(卜筮), 의술, 관상, 무예 등 각 방면에 뛰어난 자들을 비롯하여 피리나 거문고 연주, 해학이나 만담, 음주 가무, 장기, 바둑, 말 타기, 활쏘기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재주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자들을 선발하여 수행하게 했다. 당시 통신사의 규모가 약 480명이었다. 그때 이언진은 중국어 역관이었지만, 시를 잘 짓고 글을 빨리 쓰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선발되었다. 그가 일본으로 떠날 때 스승 이용휴는 그에게 다섯 수의 송별시를 써주었
다. 이 중에 “一枝鷄毛筆(일지계모필) / 한 자루의 닭털 붓으로, 欲爲三韓重(욕위삼한중) / 삼한을 무겁게 만들려 하네.”란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문재가 남달라 일본 사회를 들썩이게 할 것을 그의 스승이 내다본 것 같다. 일본인들은 조선 선비들의 서화를 좋아했다. 조선의 서화를 손에 넣으면 집안의 가보로 여겼단다. 심지어 조선인의 글씨를 받아 집에 붙여두면 불이 나지 않고, 산모가 몸에 지니고 있으면 순산한다는 속설이 퍼져 있었다. 그래서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관을 붙잡고 글자 써주기를 부탁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니 당연히 통신사 일행들은 일본의 도읍인 에도로 향하면서 지나는 곳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에도로 가는 동안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에게 갖가지 공연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잡역부인 포정(庖丁 : 요리사)이나 역부(驛夫 : 마부)까지 의자에 앉히고, 발을 비자나무로 만든 물통에 담가 꽃무늬 적삼을 입은 아이 종들이 씻어주게 했다. 이언진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도 이와 같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데, 내가 오늘 천국에 이르렀구나."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오늘날 우리가 영양 간식으로 맛있게 먹은 고구마가 바로 통신사 조엄이 종자와 재배 방법을 가지고 온 덕분이다. 그는 통신사로 가던 중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고 그 종자를 부산진으로 먼저 보내고, 그 재배법, 보관법 등을 상세히 알아서 여행기 <해사일기(海槎日記)>에 기록했다. 그 종자를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에게 전하여 재배토록 했다. 사행단은 불순한 일기로 인해 일기도(壹岐島)에 여러 날 머물렀다. 마침 큰 바람이 불자 정사 조엄(趙曮)을 비롯한 삼사(三使)가 <동정(東征)>이라는 제목으로 연구(聯句)를 짓고, 원중거(元重擧) 등도 일복선(一卜船)에 모여 운자를 뽑아 <대풍(大風)>시 80구를 지어 순풍이 부는 것을 자축한 일이 있었다. 당시 압물판사 즉 물품관리 담당이라는 하급 관리였던 이언진은 당연히 이 자리에 끼지 못했다. 그런데 스스로 11월 25일에 48운(韻) 96구에 달하는 장시 <해람편(海覽篇)>을 지었다. 며칠 뒤 <해람편>과 장단구(長短句) 병서(幷序) 등 고시 2편을 소매에서 꺼내 좌중에 보이며 평을 청했다. 좌중은 일개 역관에 불과한 그의 시재를 보고 비로소 모두 놀랐다. 남옥(南玉)은 자신의 일기에서 "淹博藻燦(엄박조찬) / 드넓은 문사가 찬연하니, 眞當世奇才(진당세기재) / 참으로 당세의 기재"라 하며 그를 진흙 속의 연꽃에 견주었다. 원중거(元重擧)는 "體不雅正(체불아정) / 체가 아정하지 못하다"라는 단서를 달아 "弔詭炫煌(조위현황) / 지극히 기이하고 휘황하다."라는 평을 남겼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행단 내부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알렸다. <해람편>을 읽어보면 일본의 진기한 풍물과 풍속, 지리, 인심 등 해박한 지식을 옛 전거(典據)에 비유하여 상당히 고풍스럽게 표현하여 그의 방대한 독서량을 엿볼 수 있다.
이언진은 한어(漢語) 역관이라 일본어 통역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바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문인을 만나고 싶은 인본인이 나타나면 먼저 접근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자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조선의 역관들은 호랑이 가죽, 표범 가죽, 담비 가죽, 인삼 등 금지된 물건들을 가져다 일본인들의 보석이나 보도(寶刀)와 몰래 바꾸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물품을 구하려고 거간꾼을 내세웠다. 거간꾼들이 이익을 노려 온갖 수단을 부리자, 일본인들은 손가락질하면서 조선인들을 비난했다. 그런데 이언진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글을 써주고도 추호도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성대중(成大中)·남옥(南玉) 등 공식 서기(書記)들은 공문서와 기타의 글 등 하루에 수 백여 수를 짓다 보면 문학적 정취에 비중을 둘 수 없지만, 그는 개성이 번쩍이는 시로 일본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사신 행렬이 어느 도시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의 이름이 먼저 퍼졌다. 오사카(大阪)에서 체제를 정비하느라 며칠 묵을 때, 손님이 워낙 많이 찾아오자 제술관(製述官) 남옥(南玉)은 오전원계(奧田元繼)라는 일본 문인을 이언진에게 이렇게 미뤘다. “외당에 사역원 주부 이언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고사를 잘 아니 만나보십시오. 분명히 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날 남옥이 만날 일본 문인이 19명이나 되었으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이언진에게 맡긴 것이다. 이언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박한 학식과 번쩍이는 시를 지어 일본 문인들의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에도에 도착했을 때는 소문을 들은 일본 문사들이 그를 수소문해 찾아올 정도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운아(雲我 : 이언진의 호) 선생은 둘도 없는 국사(國士)다."라고 극찬했다. 이언진은 글씨와 문장으로 일본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고, 일본의 이름난 중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다. 당시 일본 문인들은 조선 문사들의 시를 얻고 싶어서,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명함을 들여놓으며 만나 달라고 신청한 다음에, 허락받으면 들어와서 인사를 나누고 필담과 시를 주고받았다. 하루에도 몇 명씩 만나고 몇 십 수씩 시를 짓느라 조선 문사들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투어 빠른 이언진에게 시문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수전(繡牋 : 수놓은 비단)과 화축(花軸)을 상에 가득 쌓아놓고, 어려운 글자와 억센 운을 내어 이언진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그러나 이언진은 즉석에서 시를 짓기를 마치 오래전에 지어놓은 것을 외우듯이 했다. 운을 맞추는 것도 평탄하고 여유가 있었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피로한 기색이 없었으며, 필체가 힘이 있고 날아갈 듯했다. 이언진처럼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첩(神捷)이라고 불렀다.
이언진의 일본 활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하루는 일본인들이 또다시 글을 써달라고 필담(筆談)으로 졸랐다. "무엇으로 시를 쓰는가?" 이언진이 일본인에게 물었다. "동사(東寺)는 우(郵 : 역참, 오두막집)와 같고, 중은 기생과 같다 [東寺如郵僧如妓(동사여우승여기)]. 이를 시로 답을 해주시오." 일본인의 말에 이언진이 빙긋이 웃고 필묵을 나는 듯이 움직여서 단숨에 시를 지었다. 왜인들이 모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벌렸다. "정말 빠르고도 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라고 칭찬했다. 그러자 "그대들은 오늘 천인(天人 : 천재)을 만난 것이오."라고 이언진은 큰소리를 쳤다. 일본인이 대뜸 "공이 천인이라면 오백 자루의 부채에 시를 써줄 수 있겠소?"라며 그를 시험했다. "뭐가 어렵겠는가."라며, 이언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일본인들이 웅성거리면서 정말 빈 부채 오백 자루를 가져왔다. 이언진은 먹을 여러 되 갈아놓고 일본인들이 운(韻)을 읊는 대로 단숨에 부채에 써 내려갔다. 일본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선인들조차 감탄하여 그를 신필이라고 불렀다. 또 그 일본인이 부채 500자루를 들고 와서, "공의 재사(才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미 공이 신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기억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원하옵건대 조금 전에 부채에 쓴 시를 다시 부채 오백 자루에 그대로 써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손히 물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부채를 펴 보시오." 이언진이 말하자마자 부채에 전의 그 시를 써 내려갔다. 이언진이 부채에 글을 쓰는 곳에 일본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언진이 기억을 더듬으면서도 글을 써 내려가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혹자는 붓이 움직이는 소리가 가을비 내리는 소리 같다고도 했다. 왜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언진은 거침없이 오백 자루의 부채에 같은 시를 쓰고 옷깃을 여미고 앉았다. 이때가 아직 해질 무렵도 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놀라서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다. 이언진에 대한 소문은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파다하게 퍼졌다. 그가 일본에서 보고 느낀 것을 아주 긴 시로 썼는데, 그중 당시 일본 최대 도시라는 오사카(大阪)를 묘사한 것을 보면 조선의 경제력과 일본의 경제력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大阪大都會(대판대도회) / 오사카는 대도회지라서
瓌寶海藏竭(괴보해장갈) / 진귀한 보물들을 용궁에서 다 가져온 듯
奇香爇龍涎(기향열용연) / 기이한 향은 용연향(龍涎香)을 사른 것이고
寶石堆雅骨(보석퇴아골) / 보석은 아골석(雅骨石)을 쌓아 놓았네.
牙象口中脫(아상주중탈) / 코끼리 입에서 뽑아낸 상아
角犀頭上截(각서두상절) / 무소 머리에서 자른 무소뿔
波斯胡目眩(파사호목현) / 페르시아 상인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浙江市色奪(절강시색탈) / 중국 절강의 저자도 색이 바래네.
그리고 당시의 일본인의 품성이나 사회 현상을 묘사한 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역사의 현장을 느낄 수 있겠다.
秘怪恣怳惚(비괴자황홀) / 신비하고 기괴해 마구 얼을 빼네.
其民裸而冠(기민나이관) / 백성들은 알몸에 모자를 쓰고
外螯中則蝎(외오중즉갈) / 독하게 쏘니 속이 전갈 같네.
遇事卽糜沸(우사즉미불) / 일 만나면 죽 끓듯 요란 떨고
婦女事戱謔(부녀사희학) / 계집들은 남자들에게 농지거리
童子設機括(동자설기괄) / 아이들은 잔꾀를 잘 부리네.
背先而淫鬼(배선이음귀) / 조상은 등지고도 귀신에 혹하고
嗜殺而佞佛(기살이녕불) / 살상을 즐기면서 부처에 아첨하네.
牝牡類麀鹿(빈모류우록) / 남녀는 사슴들처럼 문란하고
友朋同魚鱉(우붕동어별) / 또래들은 물고기처럼 몰려다니네.
한 번은 이언진은 사람을 시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에게 시를 보내 평가를 받기 원한 일이 있었다. 박지원은 혹평으로 그를 실망시켰다. 얼마 후 이언진이 세상을 떠나자, 박지원은 자신이 젊은 천재를 타박한 것을 뉘우치며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했다. 이에 박지원은 <우상전(虞裳傳)>을 지어서 그를 평가 절하한 것을 참회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연암(燕巖)이 쓴 <우상전>의 글 중 이언진의 글을 혹평했던 대목을 묘사한 것이다.
<나는 우상과는 생전에 상면이 없었다. 그러나 우상은 자주 사람을 시켜 나에게 시를 보여 주며 하는 말이, “유독 이분만이 나를 알아줄 수 있을 것이다” 했다기에, 나는 농담 삼아 그 사람더러 이르기를, “이거야말로 오농(吳儂 : 중국 강남지방의 방언인데 중원 사람들이 얕잡아 보는 뜻으로 사용)의 간드러진 말투이니 너무 잗달아서 값나갈 게 없다.(此吳儂細唾 瑣瑣不足珍也.)” 했더니, 우상이 성을 내며, “창부(倡夫 : 시골뜨기라는 뜻으로 강남 사람이 중원사람을 비하하는 말)가 약을 올리는군!” 하고는 한참 있다가 마침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상에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고 몇 줄기의 눈물을 쏟았다기에, 나 역시 듣고서 슬퍼했다.……나는 전에 속으로 그의 재능을 남달리 아꼈다. 하지만 유독 그 기를 억눌렀던 것은, 우상이 아직 연소하니 머리를 숙이고 문장의 도(道)에 나간다면, 글을 지어 후세에 남길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언진을 조선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세상이 가소(可笑)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천재적인 명성을 날렸다. 동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에 머물렀던 곳을 다시 들렀더니, 그새 그의 시들이 모두 책으로 간행되었을 정도였다. 반짝하는 시(詩)의 한류(韓流) 아니 조선류(朝鮮流)였다고나 할까. 일본의 문인인 류우몬(龍門 용문) 류우이칸(劉維翰 유유한)과 문학조류에 관해 이틀을 토론했는데, 이 내용은 류우몬의 문집 <동사여담(東槎餘談)>에 실려 있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가기 전 이언진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지은 시와 일본 문사와의 필담을 통해 통신사 일행 중 그의 위상은 뒤로 갈수록 돋보이게 되었다. 일본 문사들은 이언진 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여타 문인보다 그를 더 높게 평가했다. 이때 류우몬은 이언진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한양대 정민 교수의 논문을 보면 그의 일본 활약상이 자세히 나와 있다. <동사여담> 이외에도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필담 자료 중 이언진과 주고받은 대화가 기록된 것은 모두 5종이 남아 있다. 유학자이면서 의사였던 구정남명(龜井南冥)의 <앙앙여향(泱泱餘響)>, 오전상재(奧田尙齋)의 <양호여화(兩好餘話)>, 금정송암(今井松庵)의 <송암필담(松庵筆語)>, 내산속재(內山粟齋)의 <속재탐승초(粟齋探勝草)>, 남천금계(南川金溪)의 <금계잡화(金溪雜話)>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이언진과 처음 대화를 나눈 사람은 귀정남명(龜井南冥, 1743~1814)이다. 통신사행은 1763년 12월 3일부터 12월 26일까지 23일간 축전주(筑前州) 남도(藍島)에 머물렀다. 귀정남명은 당시 21세의 약관이었다. 젊은 나이에도 시명이 높아 빈관(儐館)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우리 사행과 시문을 수창 했다. 처음에 귀정남명은 남옥, 성대중, 원중거, 김인겸 등을 만났다. 이어 의원인 모암(慕菴) 이좌국(李佐國)과 필담을 나누던 중, 시를 한 수 지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이언진이 붓을 들어 그 시에 화운(和韻)하면서 둘 사이에 필담이 이루어졌다. 귀정남명은 “그대와 나눈 하루 밤의 대화가, 십 년의 독서보다 훨씬 낫구려(與君一夜話, 勝讀十年書)”란 구절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언진이 <만부서목록(萬部書目錄)>에 대해 묻자, 남명은 지난해 나가사키에서 한 질이 17,000권에 달하는 <흠정고금도서전서(欽定古今圖書全書)>를 본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고금도서집성>은 1776년에야 조선에 처음 들어온 책이다. 일본에는 1762년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강남을 통해 직수입한 것이라 조선보다 빨랐다. 이언진은 자신의 세 가지 소원이 천하의 기서(奇書)와 천하의 훌륭한 선비, 그리고 천하에 이름난 산수를 두루 보는 것이라며, 일본 가사(佳士)의 기서 목록을 알려줄 것을 부탁한다. 남명은 각 지역별로 출중한 문인 학자를 열거해 주었다. 이언진은 대화 중에 일본 문예의 동향과 뛰어난 문인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바람을 감추지 않았다. 명나라의 뛰어난 문학가 왕세정(王世貞)의 문장에 대한 생각을 먼저 물은 데서, 일본 문예에서 왕세정의 영향력을 그가 잘 알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렇게 해서 은연중 주머니 속 송곳이 드러나듯이 자기의 실력을 드러냈다. 이언진은 일본행에 앞서 일본에 대한 공부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해람편(海覽篇)> 같은 작품에 동원된 고사의 수준도 그렇고, 일본 문인이나 문단의 전반적 동향에 대한 이해 면에서도 그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다. 오전상재(奧田尙齋)의 <양호여화(兩好餘話)>는 오사카에서 이언진과 나눈 필담이다. 제술관 남옥이 다른 손님 접대로 나가면서 사역원주부(司譯院主簿) 이운아(李雲我)를 만나면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라고 한 바로 그 일본 문사이다. 그들의 대화를 살짝 들어보자. 여기서 선루(仙樓)는 오번상재의 호이고, 운사마(雲樣)는 이언진이 일본에서 사용한 별호인 운아(雲我)의 존칭이다.
선루 : 압록강 서편 몇 리부터 요(遼)란 말은 들었지만, 인적 없는 광야라고는 못 들었습니다. 그대의 말이 의아하군요.
운사마 : 제가 예전에 지은 시가 있습니다. “千里茫茫無聚落(천리망망무취락) / 천리 길 망망하니 마을 하나 없고, 林鼯亂叫野鵰飛(임오난규야조비) / 숲에 날다람쥐 마구 울고 독수리 나는구나.” 이런 상황입니다.
선루 : 두 구절의 시뿐인데 능히 인적 끊긴 사막의 황량함을 묘사해 듣는 이로 하여금 홀연 기운이 꺾이고 떨리게 합니다. 전체 시를 볼 수 있을까요?
운사마 : 좁은 소견으로 엿본 것을 조금 보였을 뿐입니다. 어찌 다 보여드리겠습니까?
육로로 북경 사행길을 두 차례나 오가며 겪은 고행이 묻어나는 이언진의 시에 일본인이 감탄한 것이다. 일본인들의 필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조선의 학문과 문학사조가 일본의 것과 매우 다른 특색을 나타낸다. 조선은 과거 위주의 공부에 정주학(程朱學)을 기반하고 다른 학문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폄훼하는 풍토이다 보니 다양성이나 깊이가 부족했다. 반면에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고, 중국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수입하여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오규소라이(荻生徂徠) 같이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이룬 학자도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학문 수준은 당시 조선 사행들이 본격적인 토론을 회피해야 했을 만큼 정치(精緻)하고 깊이가 있었다. 미리 준비한 까닭도 있지만, 독서의 폭과 깊이에서 이들의 수준은 결코 조선 문인들이 얕잡아 볼만큼 만만치 않았다. 특히 유유한 같은 학자는 조선 사행 문사들의 학문적 관점이 고루하다고 생각하였다가 이언진의 시를 전해 듣고 흥미를 가지고 찾아왔다. 둘은 명나라의 고문파(古文派) 학자 왕세정(王世貞)과 이반룡(李攀龍)에 대한 학문적 토론을 했다. <송암필담>을 남긴 금정송암(今井松庵)과도 위와 같은 주제에 더하여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문예론까지 치열한 논쟁을 했다.
유유한과의 필담 문답에서 이언진은 이렇게 말했다. “제 주머니 속에는 초고(草稿)가 많습니다. 귀국 후 한 부의 책을 저술코자 하는데, 이름을 <산호철망(珊瑚鐵網)>이라 하겠습니다. 일본의 기인재사(奇人才士)와 신령스러운 산과 좋은 물, 진귀한 보배, 풀과 꽃, 돌과 새 짐승 하나하나의 기이함을 또한 빠뜨리지 않고 다 포함시키렵니다. 마땅히 작은 전기를 실어, 천하 만세로 하여금 용문선생(龍門先生)이 있으나, 묻히어 세상과 만나지 못했음을 알게 하겠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이언진은 일본 체류 중에 지은 시문을 모아 <산호철망>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을 작정을 했던 듯하다. 이런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 정리해 둔 초고와 메모가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의 문집에 남아있는 일본 사행시의 시문은 고작 40여 수에 지나지 않는다. 「자제일본시집(自題日本詩集)」이란 작품이 남았으니, 스스로 <일본시집>을 묶고 앞에 제시까지 달았던 일이 있다. 하지만 <산호철망>이란 제목이 붙을 뻔했던 이 시집은 전문 그대로 죽기 전에 자신이 불태워 버렸거나, 다른 연유로 사라졌다. <산호철망>이란 남쪽 바다에서 나는 보배로운 물건 즉 일본에서 얻은 보배를 철망으로 쓸어 담아 왔다는 뜻이다. 명나라 왕가(汪珂)가 지은 48권 분량의 방대한 저술에 <산호망(珊瑚網)>이란 저술이 있고, 또 명나라 주존리(朱存理)의 <산호목난(珊瑚木難)> 8권이 있으며, 명나라 조기미(趙琦美)는 <철망산호(鐵網珊瑚)> 16권을 엮었다. 특히 조기미의 책은 이언진의 <산호철망>을 순서만 바꾼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언진은 진작에 이들 저작을 읽고, 그 제목에 흥취를 느껴 이에 버금가는 필기류 저작을 남길 의욕을 지녔던 듯하다.
귀국 후 이언진은 출국 전과 달라진 위상을 피부로 느꼈다. 그의 활약상은 과장을 보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김조순이 「본전(本傳)」에 남긴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 좋은 예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행을 골탕 먹이려고 떼로 몰려와 시문을 요구하고, 어려운 험운(險韻)으로 된 시를 갑자기 내놓아 화운(和韻)을 요구하곤 했다. 이언진은 언제나 귀신같은 솜씨로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이언진은 재능이 출중했으나 불과 27세에 요절한다. 이언진이 병이 깊어 임종이 가까웠을 때, 성대중이 찾아왔다. 그는 여러 말로 이언진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성대중이 물었다. "자네는 병들어 있으면서 슬프고 기이한 시만 지었는데, 어째서 부귀스러운 시는 짓지 않는가?" 이언진이 빙긋이 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의 시를 지었다. “初地山川黃葉外(초지산천황엽외) / 산천은 단풍잎에 둘러싸이고, 諸天樓閣白雲中(제천누각백운중) / 하늘의 누각은 흰 구름 속에 있구나.” 마치 죽음을 초탈한 쓸쓸한 표현이다. 성대중이 "자네는 재주가 많은데, 재주는 안에다 쌓아둘 것이지 밖으로 내놓을 것은 못 된다네. 재주 재(才)란 글자 자체가 안으로 삐친 것이지, 밖으로 삐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했다. 그러자 이언진이 "쓸모 있는 나무는 사람들이 베기를 생각하고, 쓸모 있는 자개(貝)는 사람들이 뺏으려 하니, 어찌 두렵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 성대중이 그의 얼굴을 보고 "지금 자네의 눈동자가 빛나니 결코 죽지 않을 것일세."라고 위로했다. 그러자 "이공동이 죽은 뒤 100여 년에 도둑이 그의 무덤을 파니 눈동자가 반짝이며 썩지 않았는데, 이것을 죽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대꾸했다. 그의 <창광절구(窓光絶句)> 시에는 이렇다.
窓光蒼黑變成紅(창광창흑변성홍) / 어둡던 들창 빛이 붉게 변하더니
嶺上殘霞落日烘(령상잔하락일홍) / 고개 위의 저녁놀 석양에 불타네.
欲狀此時奇絶觀(욕상차시기절관) / 이때의 기이한 경치 형용하려니
桃花林裏水晶宮(도화림리수정궁) / 복사꽃 숲 속의 수정궁일세.
성사집(成士執 : 성대용)이 말하기를, “그가 복사꽃 피는 시절 저물녘에 삼청동 석벽 아래에 있는 집에서 죽었으니, 이것이 곧 시참(詩讖)이었다.”라고 하였다. 시참이란 죽음이나 불길한 일이 시의 내용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언진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 "공히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툴 수 없다면, 썩어버리기로는 초목과 무엇이 다르랴. 남겨 두어야 무익하다. 세상에 누가 이언진을 알아줄 것인가" 하고는 자신의 글을 아궁이 불에 던져버렸다 한다. "아니, 이 귀한 것을 어찌 태우려고 하십니까?"라며 그의 아내가 깜짝 놀라 불을 껐으나 이미 대부분 타버렸다. "남겨두어야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세상에 누가 나를 알아주겠는가?"라며 이언진은 공허하게 웃었다. 그의 아내가 타다 남은 원고를 거둬 지인들에게 건네서 문집으로 남게 되었다. 문집이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라는 것은 이언진 호 송목관(松穆館)의 타다 남은(燼餘) 원고라는 뜻이다. 그가 27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했다. 그의 스승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만사(輓詞 :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 5수를 지었는데 2 수만 보자.
五色非常鳥(오색비상조) / 오색빛의 비상한 새가
偶集屋之脊(우집옥지척) / 우연히 지붕 용마루에 왔네.
衆人爭來看(중인쟁래간) / 뭇사람 다투어 와 구경하니
驚起忽無跡(경기홀무적) / 놀라 날아 홀연히 자취가 없네.
無故得千金(무고득천금) / 까닭 없이 천금을 얻게 되면
其家必有災(기가필유재) / 그 집안에 필히 재앙이 있지.
矧此布世寶(신차포세보) / 하물며 이 세상에 드문 보배를
焉能久假哉(언능구가재) / 어찌 오랫동안 빌릴 수 있겠는가
이용휴의 만사는 이언진을 하늘에서 빌려 온 천재라고 칭송하고 있다. 그는 나머지 시에서, 이언진은 빗방울처럼 많은 필부지만 죽고 나니 빈자리를 느낀다고 하며, 그의 쓸개가 박처럼 크고, 눈이 달처럼 밝고, 팔꿈치에 귀신이 붙었고, 붓에는 혀가 달렸다고 읊으면서, 아들 없이 죽어도 여전히 그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아무튼 이언진의 시는 모든 것을 종합해도 넘치지 않으며, 은은하고 기묘하면서도 편벽되지 않고,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허황되지 않다고 본다. 당시의 사회적 제재가 심했는데도 위축되지 않았으니, 우리나라에는 이만한 시인이 드물다. 대체로 문장이 넘치면 내용은 소홀하게 마련이다. 이언진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오만스럽고 교만하고 특이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고서 어떻게 요절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다음의 시를 보자. 관한경(關漢卿)은 통속 잡극 작가인데 그를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 등의 역사가와, 두보(杜甫) 이백(李白)과 같은 시인에 비견하고, 수호전은 소설임에도 사서삼경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才則如關漢卿(재즉여관한경) / 관한경(원나라 통속 극작가)과 같은 재주 가졌다면
不必遷固甫白(불필천고보백) / 사마천과 반고, 두보와 이백 같이 될 필요 없으리라.
文則讀水滸傳(문즉독수호전) / 글이라면 수호전 같은 책을 읽으면 되지
何須詩書庸學(하수시서용학) / 어찌 반듯이 시경·서경·중용·대학이랴?
이언진은 문학을 하는 이들이 옛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쥐구멍[鼠穴(서혈)]으로 들어가려고만 애를 쓰지, 지금 사람들이 만든 토끼 길[兎徑(토경)]로는 가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존고폄금(尊古貶今) 즉 옛 것을 존중하고 지금 것을 폄하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여러 번 드러냈다. 투식을 뒤엎고 습관을 벗어난 틀에 박히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며 새 문학에 대한 열망을 이야기했다. 이제 그의 남다른 격식을 짐작케 하는 시 한 수를 마지막으로 글을 끝낸다.
詩不套畵不格(시불투화불격) / 詩도 그림도 격식에 얽매이지 말고
飜窠臼脫蹊徑(번과구탈혜경) / 껍질을 버리고 늘 가던 길을 벗어나라.
不行前聖行處(불행전성행처) / 앞선 성현들이 가던 데를 따라가지 말아야
方做後來眞聖(방주후래진성) / 비로소 후대의 참 성현이 될 수 있다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