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노스트라다무스인가, 실학자인가 – 이서구
예언가적 이적을 많이 남긴 실학자
이서구(李書九)는 1754년(영조 30)에 출생하여 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등이다. 아버지는 영의정(政府領議政)을 증직 받은 이원(李遠)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부사 신사관(申思觀)의 딸이다. 계모(繼母)는 진주 이씨(晉州李氏)로 이한복(李漢復)의 딸이다. 그는 외할머니에게서 자랐으며 외숙(外叔)으로부터 당시(唐詩)·<사기>·<통감(通鑑)> 등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숙종 1)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경전(經典)을 읽기 시작했다. 16세부터는 문장가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1770년(영조 46)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잃었다. 이때까지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글을 배웠으며 금석(金石)·육서(六書) 등에 대해 두루 수업을 받았다. 그는 21세 되던 1774년(영조 50) 가을에 정시(庭試) 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다. 10월에 섭기주(攝記注)로 첫 벼슬을 받았다. 22세 때인 1775년(영조 51)부터는 약 6년간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특히 역사책을 깊이 공부했다.
<이서구 초상화>그 해에 이덕무(李德懋)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사가시인(四家詩人 : 이서구 · 이덕무 · 박제가 · 유득공) 또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사서, 1786년(정조 10)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이서구는 사가시인의 한 사람으로 한자의 구조와 의미를 연구하는 데에 조예가 깊었으며 글에 쓰이는 전고(典故) 또한 널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예에도 뛰어났다. 사가시인 중 이덕무·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 서얼 출신인데 반하여 그는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은 일생동안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다. 또 아들이 없음과 늙어감 그리고 벼슬을 한 일을 평생의 애석한 일로 여겼다. 문집으로 <척재집(惕齋集)>16권 7 책과 <강산초집(薑山初集)>4권 1 책이 전한다. 이상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기록된 그의 생애이다.
<한벽당>겉으로 드러난 그의 생애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능력과 취미를 살펴보는 것이 그 사람의 내면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이나 시작(詩作) 활동은 그 시대의 사대부 학자라면 그것이 생활 그 자체라서 일세를 풍미하는 문학가가 아니라면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개인의 숨겨진 능력이나 취미 활동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서구는 지방관을 하면서 다양한 이적(異蹟)을 나타내 보이곤 했다. 당대의 잘 나가는 실학자라서 과학과 실학을 중시한 사람이었음에도 민간에 전해오는 설화나 전설에서 그는 다양한 이적을 실행했다. 그는 관직 생활 중, 평안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 2회, 경상우도 암행어사 등을 경험했다. “환곡은 생판으로 빼앗는 것입니다. 환곡이 없다면 낙토(樂土)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환곡을 바치고 나면 백성은 자루를 거꾸로 털어 끼니를 충당하고, 세금은 지방관 개인 돈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라며 이서구는 환곡과 군정, 노비 문제를 보고하고 수정 방안을 내놓지만 그렇게 개선되지는 않는다. 그는 부임지마다 행정의 우선 기준을 백성에다 둔다. 그러다 보니 지방민에게 많은 신임을 얻어서 좋은 평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까 그의 행적에 좋은 전설이 저절로 생긴 것이다.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다양한 사례가 있다. 그래서 그를 조선판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봉서시 대웅전>전북 완주군 용진읍에 있는 봉서사(鳳棲寺)는 진묵(震默) 대사가 수도하며 도통을 했다는 절인데, 이 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열쇠로도 열리지 않는 궤짝 하나가 있었다. 궤짝에는 별로 많은 것이 들어 있지도 않아서 몇 대째 주지승들도 아예 열어볼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감사 이서구가 봉서사에 들렸다가 주지에게 그 궤짝이 무슨 궤짝인지 물었다. 주지는 진묵대사가 쓰시던 궤짝인데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어떤 열쇠로도 안 열어진다고 답했다. 그 말에 이서구가 열쇠가 있으면 안 열리는 법이 있느냐면서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서구가 열쇠를 넣자 그동안 어떤 열쇠로도 안 열리던 궤짝이 열렸다. 그 안에는 조그만 책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이서구개탁(李書九開坼 : 이서구 열어보다)’이라고 씌어 있었다. 게다가 책에 쓰인 내용과 이서구가 궤짝을 연 날짜와 시간이 딱 맞았다. 진묵대사(1563 ~ 1633)는 술 잘 마시고 무애행(無礙行) 잘하기로 유명했던 조선시대의 이름난 승려다. 휴정(休靜)의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후계자이기도 하다. 감사 이서구는 진묵대사가 환생한 그의 후신이었다는 설(說)이다. ‘이서구 개탁’이라는 글귀는 봉서사에 이어 선운사(禪雲寺) 도솔암(兜率庵) 마애불(磨崖佛) 배꼽의 비서(祕書) 설화에서도 나온다. 마애불 배꼽 비서는 동학접주 손화중의 무리들도 열어 보았다는 설화가 있다.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위봉사(威鳳寺)의 뱀 흑질백장(黑質白章)을 먹고 도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솔암 마애석불>전주시 완산구에 한벽당(寒碧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전주 최씨 최담(崔霮)이 태종 4년 1401년에 지은 누각(樓閣)이다. 어느 날 이서구가 한벽당의 경치를 감상하다가 “앞으로는 이 한벽루 옆으로 불말(火馬)이 지나다닐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단다. 그의 말대로 일제강점기, 철로가 나고 굴이 뚫리면서 기차가 통과했다. ‘불말’은 화차(火車)를 의미하며, 초기의 기차는 조개탄으로 불을 때서 증기로 운행했으니 화차 즉 불말이 맞다. 1931년 한벽터널이 개통되어 1981년까지 기차가 다녔다. 그런가 하면 집 방향을 서향에서 남향으로 바꿔 가난을 벗어났다는 전주의 가사좌향(家舍坐向)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주의 땅기운을 지키려고 전주성 북쪽을 보강하여 북고사(北固寺)에 나무를 심고 절 이름을 <진북사(鎭北寺)>로 개명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또한, 전주 서북쪽에 숲을 조성해 <숲정>이라 불러 재물 운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였다는 이야기, 승암산의 화재를 막으려고 <인봉>에다 방죽을 만든 이야기, 전주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쪽으로는 산이 없어 훤히 트인 지형이다. 풍수적으로는 좋지 않아 북쪽 가련산(可連山)의 지세를 비보(裨補)하여 물을 흐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승된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은 오지다. 이곳을 지나던 이서구는 “장차, 이곳에 물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예언대로 1920년 동상저수지(東上貯水池)가 만들어졌다. 더욱 압권인 예언은 새만금 관련이다. 그는 지금 새만금 지역을 둘러보고 “수저(水低) 30장이요, 지고(地高) 30장이 될 것이다.” 변산 앞바다 쪽의 바닷물이 30장 밑으로 내려가고, 해저의 땅이 30장 위로 올라온다는 예언이다. 바다가 융기한다는 예기인지 모르지만, 새만금 간척으로 땅이 된 것은 실현되었다.
<새만금 방조제>이서구 누님의 예도 하나 있다. 그는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형제가 없고, 위로 누나 한 분은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남편이 일찍 죽었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부득이 전라감사인 동생에 의지해 살고 있었다. 4살 된 생질이 자기에게 기어 오면 때려서 울리곤 했다. 이를 본 누나가 감사 업무가 복잡하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여러 차례 반복되니 마음이 좋지 않아 말했다. “아무리 귀찮아도 어린애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렇게 때리려면 나에게 말할 것이지.”라고 하였더니 그가 “열다섯 살이면 죽을 것을 정들어 무엇하겠소?”라고 했다. 깜짝 놀란 누나가 “열다섯 살에 죽을 줄 알면서 더 살게는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왜 못 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누님이 해야 되지 다른 사람은 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하고 물었다. “옛날에는 명이 짧은 것은 알았지만 연장할 수 없었기에 버려뒀는데, 천문을 통달하고 보니 안 되는 것이 없기에 누나가 정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때린 것이다.” 라면서 비방을 얘기했다. 모일(某日)에 자정에 음식과 술을 준비해 전주 서학동 다리 위에다 차려놓고 다리 밑에서 기다려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자정이 되니 인적은 없고 저승사자들이 오더니 앞에 온 사자가 명이주(命移酒)라고 하며 지나가고, 두 번째 온 사자도 같은 말을 하고 지나갔다. 세 번째 온 사자가 책임자였는지 “야들아, 이리 오너라 음식이 맛이 있겠으니 먹고 가자.”라고 하였다. 그러니 앞에 가던 사자들이 “어떻게 하려고 먹고 가자고 합니까?” 하니, 책임자 말이 “저 어머니 아들 명이 열다섯 살이나, 감사가 시킨 일이니 감사 나이에서 열다섯 살을 깎아서 45살 정명(定命)이면 될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누나가 다 듣고 집에 와사 동생 감사를 만났더니 묻지도 않고 “내 나이가 열다섯 살 깎였구먼.” 하더라는 것이다.
<한벽터널>남원 광한루에는 해태상이 있는데, 이 해태상은 전에는 남원 사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감사 이서구가 남원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남원에 불이 많이 나는 이유는 호두산(虎頭山)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사거리에 해태상을 세워 놓고, 산 이름은 개 견(犬) 자를 써서 견두산(犬頭山)으로 해라.” 이 말대로 행하니, 신기하게도 그 후 화재가 사라졌다고 한다. 나합(羅閤)의 탄생을 예견한 것도 있다. 관찰사 이서구가 하루는 점을 보니 나주 이방의 집에 역적이 태어날 팔자였다. 하인에게 시키기를, 태어난 아이가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내버려 두라고 했다. 하인이 여자아이라 두고 왔다고 하니 이서구가 이리 답했다. “아이가 장차 커서 국권을 뒤흔들겠구나.” 과연 아이는 천하절색으로 자라나 기생을 하다가 나주목사 김좌근(金左根)의 첩이 되었다. 나합은 순원왕후의 친오라비인 김좌근(金左根)의 애첩인 나주 기생출신의 양씨(梁氏)를 가리키는 말로 ‘나주의 합하(閤下)’를 줄인 말이다. 합하는 대원군 또는 정1품 정승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김좌근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절 중에 1853년부터 10년 동안 순조, 헌종, 철종의 세 임금 아래에서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내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인물로, 양씨 또한 그에 못지않은 권력과 탐욕을 휘두른 탓에 세간에 그런 호칭이 생겨났다. 부안군 백산면에 흰바위로 덮인 백산이 있는데, 이서구가 와서 산이름을 묻자 하인이 백산이라고 대답했다. 이서구가 이산은 앉으면 죽산(竹山)이고 서면 백산(白山)이로구나라고 했단다. 훗날 동학 농민군들이 죽창을 깎아서 이 산에 모여 훈련을 했는데, 앉으면 죽창만 보여서 죽산처럼 보였단다.
<동학운동>사실이라면 신기한 능력자임에는 분명하다. 비서(秘書)에 의하면 새소리를 알아듣고, 살인자를 잡았다든가 비둘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후임자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만나 한을 풀어주고 이계(異界)와 소통하는 능력을 보이기도 했단다. 이런 것 말고 개인의 취미를 둘러보자. 성균관대의 전수경 교수의 이서구 관련 논문을 참조했다. 이서구는 대단한 장서가(藏書家)였다. 그의 조상들 특히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1637~1693)는 전국에 산재한 역대 고비(古碑), 비액(碑額), 묘갈(墓碣) 등의 탑본을 수집하여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간행할 정도로 금석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이서구는 <척재병거록(惕齋屛居錄)>에서 집안의 장서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 집은 정효공(靖孝公, 이영李瑛의 시호諡號) 때부터 벌써 장서가 수천 권이 있었고, 효민공(孝敏公, 이우李俁의 시호諡號) 때에는 서적을 모은 것이 점점 불어났다. 양덕방(陽德坊) 옛집에는 서적을 쌓아두는 누각이 있어 ‘만고장(萬古藏)’이라 편액을 붙였는데, 그 뒤 태반이 산실 되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한 벽(癖)이 있어 여러 해 동안 수장(收藏) 한 것이 거의 만 권에 이른다.” 조선의 선비 개인이 만권의 서적을 수장하고 있었으니 대단한 장서가임에 틀림없다. 기록상으로 보면 홍한주(洪翰周, 1798-1868)의 <지수염필(智水拈筆)> 첫머리는 장서가에 관한 기록이 있다.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의 속당(續堂)은 거의 4만 권이나 되고, 유하(游荷) 조병귀(趙秉龜)와 석취(石醉) 윤치정(尹致定) 두 집안도 3-4만 권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또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은 <독서차기(讀書箚記)>에서 당시 4대 장서가로 월사고택(月沙古宅), 진천(鎭川) 회와재(晦窩齋)의 만권루(萬卷樓), 안산(安山) 퇴당(退堂) 유명천(柳命天, 1633-1705)의 청한당(淸聞堂), 정재(靜齋) 유명현(柳命賢, 1643-1703)의 경성당(竟成堂)을 거론하였다. 그 밖에도 진천(鎭川) 초평리(草坪里)에 있는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집안의 만권루(萬卷樓)와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의 두릉리(斗陵里)에 있는 8천 권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외에도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의 완위각(宛委閣)의 만권루(萬卷樓)가 유명하고, 월산대군(月山大君), 허균(許筠), 이익(李瀷) 등이 만권의 장서가로 소문났다.
<이서구의 한시 답안지>이서구는 장서(藏書)만이 아니라 금석문(金石文)과 팔분체(八分體)에 깊은 학문적 조예를 보였다. 팔분체는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 변화하는 과정의 서체로 채옹(蔡邕)이 창안했다. 그는 선조들이 수집한 방대한 필첩과 비첩(碑帖) 자료를 활용하여 학문적으로도 매우 높은 경지에 올랐다. 그는 젊어서 <묵각십발(黙刻十跋)>을 지어서 서화에 대한 감식안과 비평적 시각을 잘 나타냈다. 이서구는 규장각 문신들이 학문 역량을 평가받기 위해 제출하던 각과(閣課 : 과제물) 가운데 하나로 ‘석고(石鼓)’를 주제로 삼아, 그 제작자와 그 내용을 고증하였다. ‘석고(石鼓)’는 중국 고대의 북모양의 돌로 공자묘 근처의 기양(岐陽)에서 발견된 것인데, 문자가 새겨져 있다. 사실 그의 이러한 연구 활동이 훗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바둑에도 일정 수준의 소양을 갖추어서 이덕무(李德懋)의 바둑 무용론인 <혁기론(奕棋論)>에 대응되게 <기객소전(碁客小傳)>을 지었다. 이 글에서 호남 보성 출신의 국수(國手) 정운창(鄭運昌)의 활동상을 소상히 기록했다. 당시 선비들도 애완동식물을 기르길 즐겼다. 전문용어로 ‘완금충초목(玩禽蟲草木)’이라 한다. 그는 그중 앵무새와 학에 유독 빠졌다. 그는 단순히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사육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을 남겼다. 예컨대 중국에서 들여온 앵무새를 기르며 겪은 고충을 시로 표현하였고, 또 학을 기르다가 우물에 빠져 죽은 사건을 계기로는 백탑시사(白塔詩社) 내부에서 이를 애도하는 차운시가 창작되기도 했다. 이서구는 <녹앵무경(綠鸚鵡經)>을 지어 기르던 앵무새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였다. 이 책의 서문은 스승인 박지원이 썼다.
<만권당 현판>참고로 유득공(柳得恭)은 비둘기를 좋아해서 실제 사육 경험을 바탕으로 <발합경(鵓鴿經)>을 남겼다. 이서구는 그의 글 <소완정금충초목권서(素玩亭禽蟲草木卷序)>에서 소완정에 거처하면서 “나는 날마다 그 속에서 편안히 쉬면서 새와 곤충, 풀과 나무 중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세밀히 보고 꼼꼼히 들어 하나라도 얻는 바가 있으면 그때마다 시로 읊어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에 ‘새’에서 16편, ‘곤충’에서 10편, ‘풀과 나무’에서 또한 각각 9편을 얻어 모두 44편의 시를 지었다.”라고 술회한다. 앵무새를 길렀으니 새에 관한 기가 가장 많다. 이서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앵무새와 실랑이를 벌이며 소통의 곤란에서 비롯된 답답함을 묘사하였다. 그는 앵무새에게 “말을 하지 못한다면 까마귀와 무엇이 다르겠느냐?”라고 질책하는 한편, 이 새가 중국에서 들여온 푸른 앵무새이므로 중국어로 말하고 있어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려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앵무새가 그의 말을 이해한 듯 총기가 트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기뻐하기도 한다. 앵무새 시를 보면 이렇다.
弗曉華音唤謂何(불효화음환위하) / 중국말을 모르니 뭐라고 불러야 하나
秪呼鸚鵡復鸚哥(지호앵무부앵가) / 다만 앵무라고 부르고 다시 앵가로도 불러보네.
鸚哥鸚鵡終無譍(앵가앵무종무응) / 앵가인지 앵무인지 끝내 대답 없으니
也怪儂言莫解他(야괴농언막해타) / 이상타! 내 말을 제가 모르는가.
유득공의 <죽간사앵무(竹間舍鸚鵡)>에서 “啞咜不言君莫怪(아타불언군막괴) / 벙어리처럼 말 못 한다고 그대 이상히 여기지 말게. 渠應所學是華音(거응소학시화음) / 저가 배운 것은 응당 중국말일지니.”라고 하며 이서구를 위로했다.
이서구는 그 뛰어난 애민 정신으로 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많은 치적과 이적을 남겨서 다양한 설화와 전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인격과 경륜, 학식 덕분인지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음에도 평탄하게 나이 70이 되어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그가 벼슬을 물리치고 경기도 포천의 양문에 은거할 때이다. 허름한 베잠방이 차림으로 냇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경망한 선비 하나가 시내를 건너려다, “여보. 늙은이! 나를 좀 업고 건너주게.” 했다. “그러시지요.” 하고는 젊은 사람을 업고 시내를 건너는데, 이 친구가 머리를 보니 늙은이가 정승이나 할 수 있는 옥관자(玉貫子)가 하고 있지 않은가. 시골 무지렁이 늙은인 줄 알았다가 큰 경을 치르게 생겼다. 어쩔 줄 몰라 부들부들 떨다가 창졸간에 시내를 건넜는데, 경망한 선비는 좀 전의 서슬은 간데없이 납작 꿇어앉아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었다. 그러자 이서구는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어주고는 다시 건너가 모른 척 낚시질을 하더란다. 그 시는 이렇다. 시의 형태는 당시 다양하게 즐기던 육담풍월의 일종이다.
吾看世ㅅ(人) / 오간세시옷(人) -> 吾看世人(내가 세인들을 보니)
是非在ㅁ(口) / 시비재미음(口) -> 是非在口(시비는 입에 달렸네)
若不修ㄹ(己) / 약불수리을(己) -> 若不修己(스스로 수양 않으면)
終當点ㄷ(亡) / 종당점디귿(亡) -> 終當点亡(마침내 망한다네)
<이서구의 묘비>이서구는 누나의 아들에게 15살을 떼어주고도 그 당시의 평균 연령으로 천수를 누리고 72세에 사망했다. 그는 죽으면서 몇 가지 유언을 남겼는데, 하나는 스스로 궤짝을 봉해놓고 증손자 대에나 열어 보라고 했다. 나중에 실제 증손자가 열어보니 그 안에 농기구가 들어 있었단다. 무슨 비서(祕書)나 보물이 들었을 줄 알았는데, 크게 실망했겠다. 세월이 흐르면 양반제도도 없어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을 해서 생활을 할 것을 예측한 것이다. 두 번째 유언은 자기 비석은 만들되, 절대 바로 세우지 말고 땅에 묻어 두었다가 훗날 세상이 평온해 지거든 꺼내서 묻으라고 했다. 이 비석의 비문은 그의 벗이었고 재상(宰相)인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한용구가 쓰고 유한지가 전하였다. 과연 그가 죽고 4년 뒤 당쟁이 일어 일생의 벗 남공철이 죽은 이서구를 거칠게 비난하였다. 후손들이 소문을 듣고 놀라서, 유언을 어기고 세웠던 비석을 서둘러 묻어버렸다. 오래도록 세상은 소란하였다.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해방이 되었고 전쟁이 터졌다. 그가 죽고 150년이 지난 1975년에 박광칠이라는 춘천시 남면 박암리의 마을 사람이 쇠꼬챙이로 땅을 찔러 무덤 앞 5m 땅에서 비석을 찾아냈다.(조선일보 20.3.24)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묘비를 다시 세울 때 앞뒤를 잘못 알고 비석의 몸체가 뒤바뀐 상태이다. 정 2품 이상의 관직자에게 세우는 석물은 모두 분실되었단다.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有明朝鮮右議政惕齋李公墓碑銘(유명조선 우의정 척재 이공 묘비명)'.(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