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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선 May 14. 2022

내가 교사를 한다는 것

체육대회가 끝난 후, 우리는 텅 빈 운동장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2년 전 제자들이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 다녀갔습니다.

한 시간 반이나 걸려 버스를 타고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선물을 건넸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두 책 선물이었습니다.

아, 하나는 마카롱이었는데 제가 어떤 마카롱 맛을 좋아하는지를 기억하고 사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제게 준 선물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이었는데, 이 시집을 사기 위해 한 시간을 훌쩍 넘겨 어떤 서점을 갔는데 그곳에도 없어서 다른 서점에 가서 산 시집이라고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그 시인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한 적은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 교사를 한다는 것은 저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전문성을 지니고 정확하게 가르치고 유능한 것이 제가 교사를 한다는 것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똑부러진 수업을 추구할수록 저는 공허해져가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수업은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몸과 마음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존재와 글이 맞닿아 있을 때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그것이 아이들에게 큰 배움을 가져다 주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그런 수업일수록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배웠습니다.


교사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있으나,

삶으로써, 특히 국어교사는 글과 붙어있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보여준다는 것은 치열하고 처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을 예쁜 포장지에 절대로 감쌀 수 없습니다.

작품에 이별을 겪은 화자가 등장한다면 나 또한 이별을 했던 경험의 주머니 속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찾아야 하고,

아이와의 상담 중 아이가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다면 나 또한 그런 위기를 겼었던 경험의 주머니 속에서 가장 아픈 곳을 들어가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시집을 선물한 아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배운 것 같습니다.

국어 선생님에게 문학을 배우기도 했지만,

박지선 선생님이란 어른을 보고 저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이제는 어렴풋이 저 자신의 이상형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국어 교사를 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아이들은 좋은 작품과 재미있는 수업, 협동학습을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교사 존재 자체를 통해 배우기도 합니다.

2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렇게 긴 편지를 쓴 까닭일 것입니다.



아, 한 시간 거리나 되는 곳을 오는데 마카롱을 어디서 샀냐고 묻자

2년 전 제 수업을 듣던 아이가 꼭 지선샘에게 사다드리라고 추천한 맛집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아이가 저를 싫어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저를 보고 싶어한다고 제 수업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꼭 전해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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