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 여인, 새, 별 전시회에 다녀와서
인터넷에서 어떤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기능시험을 보던 한 차량이 브레이크 페달과 악셀 페달이 헷갈렸는지 과속으로 장내를 여러 번 돌았고 결국에는 교통 표지판을 들이받았습니다.
동영상에서는 이를 '광란의 질주'라고 표현하였고 댓글들은 이를 조롱하거나 비웃는 듯했습니다.
그 운전자가 놀라지는 않았을지, 무섭지는 않았을지 운전자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터넷에는 누군가의 실수나 난처한 상황을 희화화하여 올리는 동영상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인이 재미있다고 보여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한 개그맨이 의자에 앉았는데 그 의자가 부서져서 개그맨이 꽈당 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의자가 개그맨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웃음의 초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난감한 상황에 대해 놀림 받는 것이 언제나 마음이 아픕니다.
혹자는 저에게 쓸데없이 예민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모습에 조응하는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매 순간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삶의 옹호자'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p.42
그리고 한 그림도 만났습니다.
호안 미로는 "2 더하기 2는 4가 되지 않아. 회계사들만이 그렇게 생각하지.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그림은 상상력을 풍요롭게 해야 해."(1959년 이본 타이양디에와의 인터뷰에서 발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2 더하기 2가 4가 되지 않고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2 더하기 5는 7이 되지 않고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추상화는 관객의 해석에 맡기므로) 그림의 왼쪽 하단부가 숫자 2의 잘려나간 밑 부분인 것 같고, 파란 동그라미 우측 부분에서 5의 중앙이 겨우 보이는 것 같습니다. 둘 다 온전히 보이지 않는 이유는 2+5=7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안 미로가 꿈꾸었던, 관객이 꿈꾸길 바랐던 상상력이 저에게는 그 너머의 것 혹은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실수나 난처함을 보고 대상화 하며 웃는 것이 4나 7이라면, 그 누군가의 마음이 어떨까 하며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것은 2+2=4(2+5=7)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며 그 너머의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은유 작가는 '나'의 범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p.53
저는 오늘 한 문장과 한 그림으로 제 삶의 언어를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