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더는 믿지 않기로 했다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이다
-안희연, '추리극'(<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부분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만을 향하여 가라고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최대한 성적을 올려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고, 대학생 때는 하루 빨리 취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저축을 해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빨리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만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은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로 향해 있었습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정확합니다.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고 그곳으로만 간다면 큰 사고 없이 바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미로는 당장 가야 할 곳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사방이 큰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나마 길인 것 같아 보이는 곳으로 가더라도 그것이 진짜 길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본 사람들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곳으로 가야 길이 되는지를.
그렇게 미로 속을 헤매는 두 명의 아이를 만났습니다.
한 아이에게서는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7월 23일에는 스터디 카페에서 국어 모의고사를 풀다가 울어버렸어요.
시가 저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문제를 빨리 풀어야 하는데 문제에 나와 있는 시를 읽고 또 읽고 눈물을 흘리느라 정작 문제는 풀지 못해요. 2학년 초반의 저는 시만 봐도 무서워서 읽는 것도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는데요... 이제는 시가 주는 힘을 알 것 같아요.
이 아이는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풀고 답을 맞혀야 합니다. 그것이 모의고사 공부가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입니다. 그런데 시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이 아이는 미로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아이의 본질과 존엄을 건드는 작품이었을 것 같습니다. 시를 읽고 또 읽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미로 속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미로 속을 헤매면서 이 아이는 화살표 없이도 길을 찾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시가 주는 힘을 알게 되었다고 했으니까요.
긴 글을 보내 온 한 아이가 더 있습니다.
지난 학기 문법 수업에서는 우리의 언어에 담겨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살펴봤고 나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문법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일상 속에서의 예시들을 찾아 분석하거나 틀린 표현이지만 그렇게 표현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 보기도 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문법에 대한 태도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규칙들을 외우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런 현상들을 이해하고 더 깊이 분석해 보는 것. 문법 공부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배웠다. (중략) 이러한 경험으로 나는 학교 수업으로 먼저 배우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학교에서의 문법 수업을 들은 후 방학 동안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문법 공부를 하다가 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인터넷 강의에서 가르쳐 준 대로 문제를 푸는 데 필요 없는 지식은 건너뛰고, 어떤 문제를 맞히고 틀렸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문법 공부가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도 미로 속으로 들어갑니다. 일상 속에서 맞춤법에 맞게 쓰이지 않은 노랫말 가사와 길거리의 간판을 보고 왜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을까를 생각합니다. 아직 문법 규칙이 적용되지 않은 일상의 언어를 분석해 보며 규칙을 탐구해 나갑니다. 굳이 걸어가지 않아도 되는 미로 속을 향하여 들어갑니다.
이 두 아이들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이 두 아이들과 함께 찾아 헤맸던 미로를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가시덤불도 만나고 어둠 속에 갇히기도 하고 거대한 장벽 앞에서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그 미로를 담담히 걸었습니다.
화살표 없이도, 조금 돌아가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 걸어가는 것이 우리가 그 해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