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상처를 줄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자녀는 8남매. 아들이 셋, 딸이 다섯 명이다. 나의 엄마는 6번째 딸이다.
할머니와 딸들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는데 엄마와도 그랬다. 자라면서 받지 못했던 사랑과 지원에 많이 서운해했는데 특히 할머니의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외할머니에게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쌓이기만 했다.
오랫동안 엄마를 아프게 했던 사람이 돌아가시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왜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아들보다 딸이 많을까.
시대 때문일 수 있다. 아들을 더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었으니까. 실제로 이모들의 서운함은 아들들에게만 지원해준 탓이 컸다. 어릴 적 부모에게 물질적 감정적 지원을 받고 자랐으니 자존감이 조금 더 강할 수 있다. 그렇게 아들들에게 연신 뒷바라지를 해줬지만 연로해진 할머니를 모시는 건 딸들이었다. 그러니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쌓이기만 했을 것 같다.
아들과 딸을 키울 때 다른 성별을 더 예뻐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엄마는 아들이 더 예쁘고 아빠는 딸이 더 예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겠지만 사실 마음이 조금 더 가는 자식이 있지 않나. 엄마에게 딸은 친구 같고 아들은 애인 같은 느낌이 있어 딸에게는 좀 더 편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집은 딸만 둘이지만 둘 다 엄마에게 상처가 많다. 엄마는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웠고 할머니에게 못 받았던 지원을 해주기 위해 더 많이 돈을 벌려고 애썼다. 본인은 스스로 만족했다. 아빠가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마의 몸은 지치고 마음은 힘들었다. 우린 그 힘든 마음과 감정을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받은 상처들은 대물림되어 다시 우리에게 겹겹이 쌓였다.
평생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듣고 자라 온 나도 어느새 내 엄마에 대한 원망을 아이 앞에서 토로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듣기 싫던 말들을 똑같이 내 아이에게 쏟아내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할머니도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도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던 것을 아이들에게 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원했던 방식이 아니었을 뿐. 그것이 상처가 되고 골은 점점 깊어져 감사한 것은 가려지고 마는 악순환이 되고 말았다.
이제 엄마는 할머니에게 받고 싶었던 사과를 다시는 받을 수 없게 됐다. 장례식장 1층 의자에 앉아 엄마 손을 붙잡고 말했다. "이제 엄마를 아프게 했던 할머니는 안 계셔. 마지막까지 엄마를 속상하게 하고 가셨지만 이젠 사과받을 수 없어. 엄마가 나에게 엄마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줬듯이 할머니도 그러셨을 거야. 다만 그게 엄마와 내가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상처가 남은 거지. 그러니 이해하는 수밖에 없어. 그 시절 최선을 다 했던 거라고."
내 옆에 앉은 나의 아이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원했던, 내 아이를 믿는 친절하고 다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너도 나에게 상처를 받으며 자라겠지. 자라면서 나에게 받을 상처의 크기가 커지지 않도록 너와 얘기를 많이 하고 너의 생각을 묻고 너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노력할게. 네가 원하는 사랑을 줄 수 있도록 애쓸게. 우리 친하게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