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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쓰J May 19. 2022

곰 같은 엄마의 여우 같은 딸

엄마도 여자다 -너랑은 참 다른 여자.

<커버 이미지-나의 미니미(mini-me;내가 딸을 지칭할 때 쓰는 애칭)가 지난 3월 생일에 선물해 준 꽃다발. ‘엄마도 여자다’라는 스티커를 직접 골랐다는 말에, 센스쟁이라고 칭찬해 줬다.>

이제 ‘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린 아이가 생일이라고 편지와 꽃다발을 선사했다. 아이의 편지는 매번 ‘이렇게 키워주셔서 고맙고, 더 말 잘 듣는 딸이 되겠다.’라는 비슷한 내용인데도 받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된다. 누워서 꼬물거리던 사람이 이렇게 컸나 싶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예쁘게 잘 자라주고 있는 것이 감동스러워서.  






고난 종합 선물세트


‘설상가상’

‘엎친데 덮친 격’

옛말은 그냥 있지 않다더니,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이나 불행은 위의 말들처럼 주로 앞뒤를 다투듯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에도 ‘When it rains it pours’(비가 올 땐, 폭우가 쏟아진다)라는 구문이 있는데 옥스퍼드 사전은 그 뜻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misfortunes or difficult situations tend to follow each other in rapid succession or to arrive all at the same time.
불행이나 힘든 상황이 주로 줄지어 일어나거나 모두 한꺼번에 닥치는 경향


그러니 아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그런 경험을 종종 했지만, 지난해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은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조차 내 문제만이 문제가 아닌 상황을 맞아, 비가 오면 억수같이 쏟아진다는 불행의 이치를 원망했다.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의 척추가 20도 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병원에서는 플라스틱으로 몸통 기브스를 맞춰 채우는 숙제를 내주었다. 엑스레이로 보면 휘어진 척추가 곧게 펴질 만큼, 외부 압력으로 몸을 조여 벨트로 꽁꽁 묶어야 하는 그 짓(!)을, 어미가 새끼한테 매일 내 손으로 하면서 그렇게 가슴 아프고 한탄스러울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그걸 옆에서 들은 엄마는 말씀하셨다.


‘어른들은 저거 못 참아. 아직 뭣모르는 애라서 그냥 참는 거야.’


안 그래도 아토피에 알레르기에 면역력 저하로 허약하고 깡마른 아이에게 그런 고통을 주니, 원래도 없던 입맛을 더더욱 잃었고, 몸의 불편함이 중2병과 콜라보(!)되면서 짜증이 대폭 늘었다. 우리 어른들도 속옷이 좀 조이거나, 한복 치마를 꼭 동여매면 그냥 다 풀어버리고 싶은 답답함을 느끼는데, 얼마나 힘들까 이해가 되었다. 같은 병원에서 정형외과, 안과, 소화기내과 그리고 청소년 산부인과까지 아이 몸이 편편한 데가 없다. 그러니 나는 어미 된 죄로 매일 밤마다 아이의 짜증을 받아주며 얼르고 달랬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 불면증을 얻게 되고 아픈 동안 계속된 일이었다.


돌아보면 삶의 어려움은 좀처럼 한 번에 하나씩 여유롭게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이어달리기 바통터치를 하듯이 오거나 아예 한꺼번에 떼로 몰려와 아우성을 치는 것처럼 - 고난은 그렇게 종합 선물세트처럼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련함과 엄살, 그 사이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엄마께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너는 너무 미련할 만큼 참는다. 진짜 참는 정도가 미련해."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좀 그렇긴 했다. 배탈이 나서 배가 너무 아프거나 몸살기가 있어도 꾹 참고 학교와 학원에 다녀오면, 허옇게 뜬 얼굴을 보고 엄마가 그 지경이면 쉬어야지 하셨었다. 언젠가는 놀이터에서 갈비뼈를 다치고도 엄마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병원에 가기 무서운 마음 반으로 숨기고 지나간 적도 있다.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성인이 되어서는 더욱더 우는 소리 안 하는 어른으로 지냈다.

대학 때 집에 오는 버스를 잡아 타려고 뛰다가 발을 삐끗했는데, 즉각적으로 통증이 느껴지더니 버스에 내릴 즈음에는 걸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이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또 다 큰 놈이 무슨 이런 일로 집에 전화를 하나 싶어 15분 거리의 집에 걸어(기어) 갔다. 아가씨 때 간호사이셨던 엄마는 보자마자, 너 이거 뼈가 부러진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 발로 걸어왔냐고 눈이 휘둥그래 지셨다. 사람이 뼈가 부러지면 움직이지를 못 하는 건데, 너는 참 미련하기 짝이 없다는 말을 또 들었다. 다음날 두 조각으로 똑 부러진 발 뼈를 엑스레이로 보고서야 두 달 넘는 깁스를 했다.


결혼하여 임신 후 출산예정일이 다가왔을 때 하루 이틀 전부터 배가 좀 아프더니 점점 진통이 심해졌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당부에 또 당부를 했던 말,


"초산 산모들은 좀 아프다고 병원에 오면 긴 진통시간 내내 병원에서 진을 다 뺄 수 있으니까, 집에서 최대한 참다가 병원으로 오세요, 알겠죠? 하늘이 노랗다 싶게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와야 아기가 나오는 거예요."


말을 잘 듣는(!) 나는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오나? 이게 그건가? 하며 견딜 만큼 견디다가 병원으로 갔다.

새벽 1시경 엄마랑 애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가니, 당직 간호사가 내 얼굴을 쓱 보고는, '아직 멀었네요.' 라며 대기실에 눕혀 태동 검사기만 배에 붙여놓고 나가버렸다. 예정일을 훌쩍 넘겨서 왔는데도, 당장 진행 상황이 얼마나 되었는지 볼 생각을 하지도 않은 데에는 고통을 숨긴 내 얼굴을 보고 속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간호사는 나를 분만 준비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 걸음을 떼는데 정말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되는 극심한 진통이 왔다. 겨우 의자에 앉았는데, 상황을 확인한 간호사는 곧 사색이 되었다.


"아, 아기 곧 다 나올 것 같아요. 당직 선생님 부르고, 그냥 여기에서 바로 분만하도록 할게요."  


나는 그렇게 집에서 입고  옷을 입고, 결국 관장 등과 같은 사전 준비 하나 없이 의도치 않은 '초자연 분만' 했다. 선생님이 아기를 받는 동시에 링거 주사를 꼽는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한 간호사는  팔을  번씩 찌르며 연신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의료진이 지시하는 대로 호흡과 힘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저절로 이는 악물어졌지만,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았다. 그 간호사는 본인의 실수로 제대로 된 분만 준비 없이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된 나에게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말했다.


“아이고 산모님이 그냥 다 잘 참으시네.”


처치를 받고 분만실에서 나오자, 엄마는 내 손을 잡으시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세상에... 애 낳는 게 어떤 고통인데, 그렇게 찍 소리 하나를 안 내고 아기를 낳니 그래."


콧구멍으로 수박을 꺼내는  같다던가, 윗입술을 잡고 뒤집어 끌어올려 이마 위로 뒤집어쓴다고 상상해 보면 된다던 출산의 고통 앞에서도 나는 엄마 말처럼 미련할 만큼 인내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정말  고통이 뭔지 몰라서, 도대체 얼마나 아플  나오는지 몰라서 조금조금 참아진 것도 있었다.)

아기가 1 58분에 태어났으니 병원에 도착해 분만까지  1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나는 시트콤 같은 초자연 분만 출산기를 남겼다.



그런데 나의 딸은 그랬던 나와 다르다.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아프고 힘든 것을 아주 호들갑스럽게 표현한다. 어떤 땐 너무 할리우드 액션을 하니까, 당신 딸과 너무 다른 손녀딸을 보며 엄마는 저절로 말이 나온다.


"아이고 야 호들갑 좀 적당히 떨지. 네 엄마는 정말 그 어릴 때에도 인내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징징거리는 법이 없었는데... 그런 건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았네!"  


"할머니, 엄마, 나는 진짜 그만큼 아파! 오버하는 게 아니라 아프다고!

그리고 솔직히, 엄마가 너무 많이 참고 그래서 그렇게 병이 난 거잖아! 참기만 해서 힘들게 됐잖아!" 


할 말이 없었다.

지난여름 입원을 할 때 엄마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쉬기도 해야 하고,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알아야 하니 병원에 입원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사를 받아볼 거라고 핑계를 댔었는데... 아이는 어렴풋이 다 알고 있었다. 다 알고도 엄마가 힘들어지니까 의젓하게 자기 할 일 잘하고, 착하게 지내 준 것이었다. 엄마가 아파지니 제가 아픈걸 내색않고 참으며 지냈다.


  




엄마도 여자다 - 너랑은 다른 여자


엊그제 아이와 대화를 하다가, 엄마가 스트레스로 불면증을 얻고 그 이후에 우울증 등이 동반되어 많이 힘들었었던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 딸내미랑 살아야 하는데, 회사에서 엄마한테 네가 나갈래 쟤가 나갈래 하며 저울질당하게 되니 너무 걱정이고 힘이 들어서 그랬다고.


"당연히 그렇지 엄마... 그렇게 믿고 오래 다닌 회사에서 그러면 걱정되고 스트레스받지... 회사가 진짜 못 됐다. 그래도 엄마, 엄마가 공부도 하고 능력도 있으니까, 여기저기에서 같이 일 하자고 하는 데도 많을 거야!" 

 

언제 이렇게 커서 나를 위로해주나 싶어 감동스럽고 또 고마웠다.

제가 불편하면 아주 세상이 다 알게 티를 내고, 너무 힘든 것은 무조건 견디지 않으며, 필요할 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불공정하거나 이유 없이 피해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 아이는, 나처럼 미련 곰은 아님이 분명했다.                                        



내가 집에 없던 어느 날 티브이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다 할머니께 묻더란다. 아빠가 양육비를 도대체 얼마나 주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할머니는 있는 그대로 한 달에 40만 원임을 알렸다.


“아니, 내 수학 학원 한 과목 비용이잖아?! 그걸로 뭘 어떻게 살라는 거야? 진짜 어이가 없네.”


딸내미는 그때부터,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내가 아닌 아빠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용돈도 받게 되었다.

어디 가서 부당함 앞에 그냥 당하고 있지는 않겠구나, 자기가 생각할 때 공정하지 않은 건 이야기하고 바로잡으며 살겠구나. 내 딸은 참 똑똑한 여우 같구나.

내 속에서 나왔는데도 이 여자아이는 정말 나와는 아주 다른 여자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을 해치고 상처 주는 여우가 아니라면, 나는 내 딸이 곰보다 여우인 것이 훨씬 낫고 좋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새 다 커서 ‘엄마도 여자다’라는 말을 해 주는 딸은 그렇게 나의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 엄마도 여자다 - 너랑은 참 다른 여자.

그래서 기쁘다.



가사가 좋아서 애창곡이 된 노래, ‘달리기’

오늘도 숨이 턱까지 차게 달리고 있을 당신에게 바치는 응원가.


https://youtu.be/l0dbonFJ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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