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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설의 마음 기록 Feb 11. 2022

나의 호수, 그리운.

-질문 Q 시리즈

친구의 Q: 너가 가봤던 최고의 장소는 어디야?


  장소는 '시간과 물리적 공간이 존재하는 곳'을 의미한다.

만약 장소가 그저 '시간이 존재하는 무언가' 라면 나는 '내 상상 속'이라 대답했을 텐데, 망설임 없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기에 고민을 좀 해봐야 했다.

고민을 할수록 최고의 장소가 바뀔 여지가 아주 많으며 따라서 '최고'의 가치가 계속 떨어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고민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고민을 끝내고 좀 특이한 결론- 황혼이 내리비추는 ☆☆호수공원-을 내렸다.

황혼이 내리비추지 않는 ☆☆호수공원은 그저 평범한 호수공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황혼이 내리쬘 때 ☆☆호수공원은 마침내 제 빛깔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곳엔 매번 다른 하늘이 흐르고 매번 다른 바람이 분다.


  하늘만 수 천 번을 보았다. 노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시시각각 기억의 조각들로 분해되어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며 이에 따라 더욱 사랑의 눈물을 북돋우는 무언가가 있다. 누구에게나 있다.

수백 년, 수천 년, 영원히 살아도 잊혀지지 않는, 

단 한 번 본, 

언제나 그리운,

잽싸게 윙크를 날리고 도망가 다시는 볼 수 없는,

슬픔의 눈물을 아니 사랑의 눈물을 일으키는,

유일무이한 황혼의 그 호수를 나는 잊지 못한다.


  그 호수에서 나는 '단 하나의 삶의 의미'를 위해 기도했었다.

귀에 감기는 조용한 물의 흐느낌과도 같은 소리와

쌀쌀한 가을바람, 물의 시원함을 느끼면서.

그 이후 여러 번 황혼의 시간에 호수를 찾아갔었다. 같은 황혼이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여전히 아름다움을 자랑하면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는 그 호수는 언제나 다른 황혼만을 보여주었다.

흡사 한 가지 색처럼 보이며 호수의 한정적인 부분만 비추는 황혼들은 예전의 다채로우며 지상의 모든 생명에게 황홀의 빛을 선사해주던 그 황혼과 많이 달랐다.

내 마음가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객관적인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장소의 황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장소를 최고의 장소라고 답을 내놓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더 이상 눈물짓기 싫어해서라고.

단연코 나에게 이 장소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다.

그리고, 이 장소보다 더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도 없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슬픔을 망각하는 동물이다.

나는 슬픔의 대명사인 이곳을 두려워서 한동안 잊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두려움을 마주하여 마침내 최종 목적-최고의 미(美)-을 마주하는 동물이다.

생명과 삶의 고통은 '최고의 미(사람마다 다르다)'를 위한 대가이며 따라서 나는 두려움을 마주하는 걸 즐거워해야 한다. 두려움이 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황혼의 시간에 호수를 가며 나의 눈물로 또 다른 호수를 만들어야만 예전의 그 황혼과 맞먹을 감동과 눈물의 황홀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황혼의 호수를 지나간 추억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새로운 추억으로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바이다.

'지나간 자는 작은 자이지만 앞으로 올 자는 큰 자일 것이다.' 나는 진실로 이를 믿는다.

그리고 동시에 '작은 고추가 더 맵다'도 믿는다.


  나는 계속해서 '황혼의 ☆☆호수'에 대해 말하지만 그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 '☆☆호수'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다. 이는 마치 '멍멍이 너무 귀여워요! 같이 살래요!" 라 말하고 막상 키울 때 개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되어 경악하는 인간과 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편견에 찌든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나무는 산에 포함되어 있고 산은 자연에 포함되어 있다.

'나무'를 사랑한다는 것은 '산'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산'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굳이 왜 '자연'을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걸까?

'강렬함'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없지만 강조가 되지 않으며 따라서 금방 잊혀진다.

또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덜 감동적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특별한 선호와 간략화'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데, '나무를 좋아해'는 '자연을 좋아해'와 동시에 '그중에서도 나무가 (제일) 좋아'를 동시에 말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세세한 건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황혼은 영원히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며

따라서 호수는 황혼의 옷을 자신의 표면에 그리고 외부에 주기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즉, 호수와 황혼은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다.

게다가 호수는 빛과 황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황혼의 아름다움은 호수가 일정 시간 드러내야 할,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는 호수의 심장이다.

빛 되는 성품을 사랑하기에 그 외의 것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였던 링컨',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였던 마이클 잭슨' 등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호수에 언제나 물이 흘러넘치기를,

언제나 빛나기를,

언제나 황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과실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축복하고 또 축복한다.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18. 9. 26에 찍은 사진
20.12.17에 찍은 사진






19.7.1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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