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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라임 Dec 08. 2022

옆사람 공인중개사 합격기

백수 로그


 내 나이가 늘어가니 주위에서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노후를 위해 회사 다니면서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리해고당한 김에 이거라도 따겠다고 덤빈 이도 있었다.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작년엔 배우자가 갑자기 그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직장은 계속 다니면서 준비를 해보겠다며. 떨어지더라도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늘지 않겠냐는 방어막을 쳐놓고 말이다.


 알아보니 과락(40점 미만) 없이 평균 60점을 넘기면 되는 전형적인 국가공인 자격증 합격 기준이었다. 언뜻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으나, 합격수기에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을만한 고생담이 가득했고, 실제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만 합격자는 많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수치를 찾아보니 2021년 기준으로 합격률이 1차 21.3%, 2차 29%로 확실히 만만치 않은 시험이었다. 10명이 지원하면 1차에 7명이 떨어지고, 합격한 3명 중 2차에서는 1명만이 겨우 합격하는 시험이라니.


 시작할 때 배우자는 학창 시절 공부 좀 해봤다는 근거를 기반으로 자신감을 보였다. 1, 2차를 한 해에 동시에 합격하는 것이 이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겐 꿈과 같은 '동차합격'이란 건데, 그건 너무 무리라며 올해 1차 내년에 2차를 합격하겠다는 그럴싸한 계획도 세웠다.


 옆에서 보니 일단 제일 유명하다는 한 출판사의 기본서 세트를 파기 시작했다. 아마도 매일 몇 페이지씩 진도를 나간다는 계획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서 가장 쓰임새가 없이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방은 책상이 놓여있다는 이유로 그녀의 공부방이 되었다. 가끔 방을 살펴보면 문제를 풀고 채점한 흔적들이 보였고, 수많은 형광펜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직장 다니면서 시험 준비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녀의 자신감과 확신이 차츰 절망으로 변해갔다. 어느 날은 자신을 보이다가도 진도가 좀 안 나간다 싶거나 어려운 부분을 만나면 풀이 죽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기출문제집을 구매했고, 정말 임박해서는 민법이라는 과목의 기본이론 강의를 온라인으로 듣기 시작했다. 얼마나 임박했던지 딱 정자세로 앉아서 강의를 듣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집에서 양치를 할 때도 그걸 틀어놓았다.


 사실 2배속으로 듣기 시작했을 땐 무슨 말인지 조차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과연 저게 공부가 될까?' 싶었다. 그런데 웬걸? 80점이 넘는 성적을 기록하며 1차 시험을 합격했다. 쓸데없이 고득점을 맞았다며 의기양양하는 배우자는 1차 합격 후 몇 개월은 쉬었던 것 같다. 아직 다음 해 기본서가 출시되기 전이었고, 당분간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올해 초 시작한 2차 시험 준비과정은 확실히 더 험난했다.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해가지고..."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확실히 2차 과목들은 난도가 높은지 전과목 기본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했고, 범위가 너무 넓은 어떤 과목은 과락만 면하는 게 목표라는 이야기도 했다. 어느 기간(ex. 포르투갈 여행)엔 흐름을 완전히 놓쳐서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미리 계획해둔 X회독은 힘들 것 같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대망의 시험 당일. 머나먼 시험장에 그녀를 내려줬다. 시험을 망친듯한 배우자는 완전히 다른 과목처럼 느껴졌다면서 떨어질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또 이게 웬걸? 골방에서 가채점을 마친 배우자의 어깨는 한껏 치켜올라 있었고, 이번에도 80점 가까운 점수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저렇게 해서 합격했다고?


 듣기론 기본서에 요약집, 예상문제집 등은 기본으로 구비하고, 그에 맞춰 강의도 따로따로 듣는다고 하던데. 배우자는 기본서와 기출문제집 만으로 합격을 했다. "내가 결제해줄까?"라고 했던 합격할 때까지 들을 수 있는 무제한 강의 패키지도 사양하고,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 과목 기본이론 강의만 듣고 말이다.


 배우자가 공부깨나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직장 다니면서 공인중개사 합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녀가 지금 하는 일도 정년이 없어서 공인중개사가 그렇게 절박한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해볼래.' 하는 맘으로 시작해서 합격까지 거머쥔 그녀가 새삼 달라 보였다. 돌아보면 참 고생이 많았다. 퇴근하면 나랑 앉아서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가장 좋다 했는데, 골방에 들어가 몇 시간씩 열중했었다. 나는 그저 그녀가 푸념할 때면 "그만해도 돼." 또는 "불합격하면 뭐 어때?!"라는 소리로 토닥이는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본인 이야기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우리 부모님에게도 알렸다. 대단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절박하진 않았을지라도 고생했던 지난 2년여에 대한 작은 보상 같은 것이었겠지. 수학이 제일 재미있었다는 백 프로 이과녀인 배우자가 이번 합격으로 여러 성취감을 느낀 것 같다. 나 또한 공부는 나 말고 그녀가 맡는 것이 좋겠다는 확실한 교훈을 얻었다.


 실제 기대를 1도 하지 않아서 합격 사실에 너무 놀랐고, 배우자는 그만큼 큰 일을 이룬 것 같다. 앞으로 우리가 XX부동산을 차릴 일은 없겠지만, 2년이란 시간을 투자해 얻은 소중한 합격증. 택배 발송 기간을 놓쳐서 조만간 같이 손 잡고 찾으러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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