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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nded Apr 30. 2023

애프터썬

애프터썬은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아빠와 딸,여행,기억,상처,과거,이해. . .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의 저류에 흐르는 단어는 오직 하나다. 사랑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아프게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가 이해하고 싶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다. 그건 소피와 애런에게도 마찬가지다. 애프터썬은 딸을 사랑하는 아빠의 절절한 기억이며 마찬가지로 아빠를 사랑하는 딸의 절박한 시도다. 늘 그렇듯 늦게 깨달은 것들에 대한 기록이며 그럼에도 이해하고자 나아가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사랑이다.

(이 영화서 훌륭한 점은 이미지의 나열에 있다. 영화는 그 감정을, 상태를 서사의 설명이 아닌 이미지로 설득시킨다. 더없이 시네마틱하다)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과거 튀르키예에서 찍은 비디오, 현재의 소피, 그리고 과거의 둘이다.


가장 의문을 자아내는 것은 과거이다. 비디오가 아닌 과거는 누구의 시점인가? 소피의 추측인가? 혹은 사실인가? 장면의 순서를 복기하자면 영화는 비디오, 군중 속의 소피, 과거 순으로 재생된다. 그러니까 비약적으로 추측해보자면 소피의 회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의아해지는 장면들은 소피가 부재하는 상황들이다. 이는 아마 비디오와 소피의 기억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일 것이다. 사실이 아닌, 진실에 다가가려는 소피의 노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성인이 된 소피는 어둠 속 춤추는 군중들과 있다. 이는 종반부 under pressure 장면과 연결된다. 영화서 소피는 태양에 대해 언급하며 같은 태양빛을 받기에 우리는 함께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피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 그 곳에 태양빛은 없다. 이 순간 그는 아빠와 다른 영역에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는 주로 깊이구도를 자주 활용한다. 예컨데 소피가 소년과 친해지는 장면 뒤에는 애런이 있다. 소피와 애런을 같이 잡는 장면 뒤에는 산과 하늘이 있다. 이렇게 레이어를 쌓으며 깊이를 강조하는 구도는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것'을 시각화한다. 우리는 깊이 구도에서 뒤의 배경과 인물들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서서히 보게 된다.


 


소피가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차린 것은 바로 아빠의 뿌리깊은 우울이다. 아빠는 사랑받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고 금전적인 위험이 있으며 이혼을 했다. 태극권을 하고 명상을 하지만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조차 어리다. 소피가 TV를 틀고 아빠의 11살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을 보자. 아빠는 왼쪽의 거울과 TV의 검은 화면에 반사되어있다. 둘 다 진짜의 모습이 아니고 선명했던 거울 속 아버지는 (아빠가 누우니)사라지고 희미하게 TV에 반사되어있다. 아빠는 그토록 연약하고 희미한 상태였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반사된 이미지를 활용하고 그렇게 인물을 담는다.


 이는 소피의 불완전한 기억과 이해를 표현하면서 아빠의 심리를 반영한다. 그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종종 아빠는 프레임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혼자만이 존재하는 장면일 때도 그렇다. 이는 그 자체로 그의 위태로움을 의미한다. 소피와 대화하며 자신의 팔을 상처를 보는 장면은 미장센만으로 모든 걸 설명한다. 소피와 그 사이에는 벽이 있고 그는 다쳤고 우울한 푸른 색에 사로잡혀있다. 그리고 소피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소피는 측면을 보고있고 그는 정면으로 앉아 아래를 보고있다.


 영화는 하늘과 물을 자주 보여준다. 소피는 하늘에 맞닿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곳은 태양의 공간이다. 그리고 아빠 역시 발코니에서 위태로운 로우앵글숏이 대변하는 것처럼 하늘을 동경한다. 하지만 소피와 다투고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이 보여주는 바는 명확한다. 그는 태양이 없는 어두운 하늘에 갇혀있으며 바다로 하강한다.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는 카메라는 이를 암시한다.



소피는 여행서 아빠와 다툰다. 왜일까 서서히 자각하게 된 성장에 대한 두려움일까 하기싫었던 수구를 하게만든 아빠에 대한 투정일까. 그들은 서로 진흙을 바르며 사과한다. 가족이 늘 그렇듯 말이다. 그리고 소피는 아빠의 생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멀리서 로우앵글로 잡힌 아빠는 기뻐보이지 않고 이는 아빠의 우울을 심화시킨 듯 보인다. 아빠는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존재하고 프레임에 가두어진다. 그는 희미하게 반사된 존재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그는 뒤돌아있다.



영화에 아빠와 혼자있는 장면들은 아마도 소피의 추측이다. 아빠의 자살을 이해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이리라. 하지만 아빠의 얼굴을 알 수 없다. 결국 이 장면은 하나의 발언이다. 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무력함의 선언이다. 춤추는 종반부에 과거와 현재가 불가해한 상처와 의문이, 무엇보다 아빠와 딸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춤추기 싫어했던 딸은 웃고 춤추고 싶어했던 아빠는 고통스럽다. 영화는 성인이 된 소피를 보여준 다음 수평트래킹숏으로 소피를 보내고 떠나는 아빠로 연결한다. 소피와 아빠는 한 프레임에 담기지 못하지만 한 숏에 존재한다. 하지만 아빠는 뒤돌아서 멀어지고 어둠 속, 소피의 기억 속으로 간다.



 영화의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 중 나를 울린 것은 종반부 경이로운 under pressure, 아빠가 바다에 빠지는 장면 등이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이 아프게 만든 단 하나는 바다에 떠있는 소피와 아빠를 담은 롱숏이다. 영화서 소피와 아빠는 종종 풍경과 함께 잡힌다. 소피에게 그 날은, 아빠의 진심은 그렇게 희미한걸까.



어린 소피는 아빠를 구하지 못했고 어른이 된 소피는 아빠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같은 프레임에 없어도 같은 숏에 있던 엔딩처럼, 혹은 그 사이에 벽이 있더라도 같은 프레임에 존재하던 장면처럼 무엇보다 이 영화 전체를, 그들의 눈빛과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빠는 소피를, 소피는 아빠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상처와 불가해한 아픔 사이에 우리에게 (뻔하더라도) 남겨진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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