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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onded Nov 20. 2023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스포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먼저 전제를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인 작품이자 (아마도) 은퇴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이 작품을 보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까 나에게 하야오여서, 하야오가 아니였다면, 이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나는 지브리라는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라는위대한 이름을 보기 전부터 볼 때도 의식했다. 그건 글을 쓰는지금도 마찬가지다. 영화만을 보고 평하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적어도 이런 류의 작품은 그것이 때로 불가능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하야오의 작품이라기에는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어디선가 우스갯소리로 너의 이름은의 미츠하가 치히로처럼 생겼으면 성공하지 못했다라는 내용을 본 적있다. 농담이지만 이것이 하야오의 경탄스러운 면모라고 생각했다. 하야오의 인물들은 사람처럼 느껴지고 나는 치히로를 볼 때 (그림이지만) 연기를 잘한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미츠하가 나에게는 캐릭터로 보인다면 치히로는 인간적이다. 그는 사람을 그릴 줄 아는 드문 작가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인간이 없다. 그런데 이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선택이 아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 특히 주인공 마히토는 미야자키의 어린 시절처럼 보이는데 결국 그것이 전부다. 김혜리 기자가 파벨만스에 남겼던 한줄평대로 영화와 인생은 다르다. 하지만 드문 경우가 있다. 스필버그, 펠리니, 알모도바르, 트뤼포 등등 그리고 미야자키는 당연히 그런 경우다.

 그럼에도 미야자키는 그의 어린 시절을 지금까지 해왔던 이미지와 주제들을 풀어놓는 무대로만 사용한다. 마히토 역시 나에게는그저 작품을 굴려나가기 위한 도구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결국 평생 다루어왔던 주제들을 반복한다. 군국주의에대한 비판, 성장담,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 결국 마히토는 미야자키의 어린 시절이여야하는 이유가 없다. 토토로는 토토로야 했고 치히로와 하쿠는 치히로와 하쿠여야했지만 마히토는 마히토가 아니였어도 된다.


하지만 이는 나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푸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는 결국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결국 이 작품은 의미다. 그런데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로 연결시킨다. 무엇은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한다. 편협한 의견이겠지만 나에게 이미지는 의미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이며 이야기고 이미지여야한다.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평을 들었을 때 기승전결을 벗어나 이미지로 영화를 빚어내는 류의 작품이리라 예측했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 펠리니의 8과 1/2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이미지들과 인물들은 의미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


탑은 메이지 유신 때 나타났고 탑 안의 세계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다. 말하는 새로 압축되는 왜가리, 펠리컨, 앵무새는 비행기에 대응된다. 앵무새들의 행태가 파시즘을 연상시킨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하쿠와 치히로의 재회와 이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그건 역설적이게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장면에 담긴 것은 미야자키가 포착해낸 삶이기에 그 모든 의미들을 넉넉히 끌어안는다. 하지만 그대들, 어떻게 살것인가의 품은 의미만 안을 뿐 삶을 껴안기에는 좁아보인다. 추상적인 의미만의 결합이고 알레고리들과의 만남이 무슨 감흥을 주는가. 이것은 적어도 나에게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탑을 모두가 무엇을 의미할까 궁금해하고 미야자키의 어린 시절을, 창작론을, 일본사회를 대입한다. 물론 그것들 하나하나에 논리적인 논거가 있겠지만 일본 사회에 대한 은유를 제외한다면 어디까지나 외부의 증거일 뿐이다. 우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 극장에 앉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히미, 키히코, 왜가리, 나히코, 할아버지 등등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의미로 앙상하게 지탱되고 있고 그렇기에 감정이 아니라 이게 뭐야?라는 의문만 양산한다.


난 늘 미야자키는 감정과 이미지가 먼저 도착하고 이야기가 이를 구현시킨다고 생각했다. 그의 창작과정이 어땠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반대인 듯 하다. 하지만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나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푸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는 결국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제목은 미야자키의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미히토는 탑을 경험하고 나왔고 여러 부분서 성장한 듯 보인다(어쩌면 탑은 미히토의 내적 고민을 형상화한 공간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왜가리 말대로 그는 그것을 잊을 것이다.(왜가리는 거짓말쟁이여서 이것도 거짓말일 수 있겠지만 난 이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아있는 생은 미히토에게 미야자키에게도 미스터리다. 현실세계는 상실로 가득차있고 탑의 세계 역시 고통스럽고 폭력적이다. 그런 세상에서(일본 사회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가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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