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얀 스티븐스의 이 앨범에는 그의 대표작 illinois의 다채롭고 풍성한 사운드가 없다. age of adz에서 선보인 일렉과 포크의 탁월한 결합도 없다. 그를 버리고 떠난 친어머니와 그를 키운 양부를 다룬 가사들이지만 어머니를 향한 격렬한 분노도 없다. 동시에 버림받은 자들이 으레 느끼는 자기연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 걸작하면 떠오르는,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도 부재한다. 이 앨범에 존재하는 것은 은은하게 흐르는 어쿠스틱 기타와 간간히 들리는 신스, 담담히 노래 부르는 수프얀의 목소리와 정확하고 아름다운 가사들이다.
나스의 illmatic이 제시했던 명반의 청사진을 기억하는가? 최고의 비트에다가 얹어진 최고의 랩이 위대한 힙합명반을 만들어낸다는 간단한 진리를 입증한 앨범이였다. 수프얀의 Carrie & Lowell은 뛰어난 곡에 실린 훌륭한 가사들과 목소리가 포크걸작을 탄생시키는 제 1원리임을 증명한다.
수프얀 스티븐스의 작품들과 유사하게 Carrie & Lowell의 가사들은 풍부한 레퍼런스들을 기반으로 한다. 버림받은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 페르세우스와 메두사, 요한과 같은 기독교적 레퍼런스들까지. 이 작품에 가득찬 레퍼런스들은 왜 그가 힙스터들과 예술에 빠진 사람들의 영웅이 될 수 있었는 지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앨범이 illinois나 michigan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아스럽게 만든다. 왜 수프얀은 굳이 이런 사적이고 개인적인 작품에도 다양하고 문학적인 레퍼런스들을 끌어왔을까?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수프얀의 어머니는 3,4살때쯤 그와 형을 버렸다. 어머니를 만드는 것은 혈연이 아니라 시간임을 생각해보자면 수프얀과 형에게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실감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치 고대의 전설, 문학, 성경과같이 사실과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듯 느껴졌으리라. 그의 작품세계서 신성과 속세를 연결시키는 새는 여기서는 허구와 실제, 삶과 죽음의 경계서 그들을 잇는 것처럼 보인다. 첫 곡이 침묵의 정령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데 수프얀에게 어머니는 그런 환상의 존재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앨범을 감도는 허무는 어머니의 상실에게서도 오겠지만, 그보다는 애초에 잃어버릴 어머니가 없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의 기억이 만든 다리는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는다.
Carrie & Lowell의 사운드는 어쿠스틱 기타와 약간의 신스사운드를 기반으로 한다. 부드럽고 아련한 멜로디는 신비로운 수프얀의 목소리와 아름답게 결합한다.
이 앨범에는 여타의 수프얀의 걸작들과 유사하게 Pedal point가 탁월하게 사용되었다. 하모니의 변화에도 유지되는 음들을 의미하는 Pedal point는 거의 모든 곡에 사용되며 중심을 잡는다. 주로 베이스에 깔리는 것과 달리 수프얀은 기타스트링에 사용했으며 이는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며 가사와 조응한다. 곡조마다 반복되며 사용되는 Pedal point는 나에게 변하지 않는 상처 혹은 상황이 달라져도 단단하게 서있는 수프얀 본인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속적으로 들리는 Pedal point는 때때로 극복할 수 없는 과거로 들리기도 한다. 이 앨범에는 디즈니 식의 화해가 없는데 이는 수프얀은 진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어떤 상처와 고통, 공허는 메우거나 극복할 수가 없다.
should have known better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그 때는 몰라다는 사실이고 과거는 수정될 수 없다는 잔인한 진리이다.
Nothing can be changed
The past is still the past
그 무엇도 변하지 않으며 과거는 과거이다. 시간에 흘러도 극복할 수 없는 상처는 상처라는 사실을 수프얀은 담담하게 노래한다. dawn to the blood에서 암시되는 학대관계부터 john my beloved, 어린 기억을 훑으며 가까이 있고 싶었다고 말하는 eugene, 예수에게 보내는 기도같은 john my beloved, (아마도 별자리를 보면서) 처연하게 부르는 the only thing까지 이 앨범의 곡들은 하나같이 슬프다.
하지만 이 슬픔은 절망적이고 자기파괴적이지 않다. 이 슬픔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 담겨있고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대성당을 감돌며 버르토크 마지막 비올라 협주곡에 실려있으며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에 새겨진 것과 같은 투명한 슬픔이다. 상처에 함몰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으며 당당하게 응시하고 함께 살아가는 자의 성숙한 슬픔이 여기에 있다. 수프얀은 그가 공허만을 느낀다고 노래하지만 그 공허는 무엇보다 따스하고 아름다우며 때로 희망차게 느껴진다. fourth of july에서 주술처럼 반복되는 우리 모두가 죽을 거라는 구절이 따뜻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Carrie & Lowell은 삶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삶은 고통과결핍으로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슬픔이 하나이며 과거는 수정될 수 없음을 노래한다. 우리의 과거 속 상처들을 소환하고 응시하게 만들며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공허를 말하며 희망을 전하고 아픔을 노래하며 치유를 믿게 만든다. 반복되는 곡조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게 한다.
수프얀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극복할 수 없는 결핍이 있음을 안다. 삶은 고통과 결핍이며 그와 함께 살아가야하는 슬픈 여정임을 그는 안다. 이 앨범서 그가 노래하는 것은 구원과 치유가 아니라 상처와 상실,결핍이다.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랬기에 우리는 이 노래들을 다 들었을 때 아름다움과 치유,희망을 발견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illumin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