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오전 10시 27분을 알려주고 있을 때, A아파트 정문 앞 신호등에 도착했다.
‘그럼 신호등 앞에서 10시 30분에 만나자.’
어젯밤 그녀와 나눈 마지막 메시지다.
그녀는 한동네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인데, 오랜만에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결국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브런치 약속을 잡았다. 신호등의 색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초록에서 다시 빨강으로 몇 번을 옮겨 다니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32분’
1분 정도 더 기다리다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응. 지금 가는 중이야.”
라고 말을 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 너머로 엘리베이터 도착 음을 들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공간 속에 숫자를 나열하며, 예상 도착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다.
11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시간 (+1분)
그리고 1층 현관에서 아파트를 빠져나오는 시간 (+2분)
그녀의 집은 B아파트이기 때문에, 약속 장소인 A아파트 정문까지 걸어오는 시간 (+3분)
결국,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은 10시 39분. 그리고 약속 장소인 A아파트 정문 신호등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40분’이었다. 나는 여유 있게 3분 전에 도착했기 때문에, 총 13분을 신호등과 마주하며 서 있었다. 신호등은 도대체 내가 언제 길을 건널지 궁금해하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한 동네 이웃끼리 10분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수건 정도는 곱게 개서, 수납장에 넣고 나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날 내게는 그런 시간이었다.
‘오전 10시 20분’
건조기가 일을 마쳤다며 나를 불렀다. 그렇지만 30분까지 약속 장소에 도착해야 했기에, 후다닥 빨래만 꺼내서 거실 소파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3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신호등과 13분을 대치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와의 만남 후,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마주한 건 흩어져있는 빨래 더미였다.
물론, 그녀가 약속 시간에 맞춰 나왔더라도, 집으로 돌아와 나를 맞이하고 있는 풍경은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던져 놓았던 빨래를 개며, 그녀의 배려 없는 행동 속에 내 시간이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동네를 1~2분 안에 거닐 수 있는 LTE급, 아니 5G급 슈퍼보드라도 있는 걸까, 아님 매 순간을 우사인 볼트처럼 전력을 다해 뛰어다닐 작정인가. 30분까지의 약속에 33분에 출발하는 여유라니. 배짱이 없어서인지 아님, 빡빡하게 사는 건지.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넉넉함이다.
대체로 이런 넉넉함을 가진 이들은 동네 약속처럼 가벼운 약속은 물론이고, 거리가 있는 곳의 약속도 10분 정도는 가볍게 지각해 주는 국룰을 깨지 않는다.
여기서 약속 시간 계산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지하철 OO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우리 집에서 1시간 정도 거리야.”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1시간인 걸까?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을 시작으로 약속 장소의 역까지 정류장 개수를 확인하고 1시간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이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부터, 아파트 정문을 나서며, 혹은 지하철역에서 교통카드를 찍는 순간부터 도착까지의 시간을 1시간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가 계산하는 법이 다르니, 가장 느슨하고 대범하게 시간을 계산하는 사람은 먼저 도착해서 상대방을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계산법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지하철로 이동할 때는 교통카드를 찍고 나와 계단을 오르고 지상으로 나오는 시간까지 점검한다. 지하철이 아닌 버스로 이동해야 할 때는 막힐지 모르는 교통상황을 고려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한다. 또한 운전해서 이동할 시에는 미리 내비게이션을 확인하여 막히거나 길을 못 찾을 경우와 주차를 하는 시간까지 대비하여 약속 시간을 정한다.
터무니없이 늦게 오는 사람을 기다릴 때면, 이런 나의 계산법이 너무 숨 막히고 치열했나, 조금 허무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항상 늦는 놈이 또 늦는다는 것을 알고도 속을 때는, 나의 계산법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타인을 배려한다는 건.
함께 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만남을 위해 준비하는 그 순간부터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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