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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Jun 20. 2022

장사는 소꿉놀이가 아니에요.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내 남편에 대한 험담이 아니며, 자영업에 대한 조언도 아니며 그저 장사에 소질이 없는 나의 실패담일 뿐이다. 자영업 성공담 혹은 조언을 듣고 싶은 분들은 '백종원의 골목 식당'이나 여타 자영업 관련 유튜브를 보시길 바란다.


 내가 처음 장사를 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이다. 나와 내 남편의 나이가 스물일곱 일 때였고 내 첫 아이가 고작 4살일 때였다. 내가 처음 한 장사는 세차장이었다. 그것도 속된 말로 '아다리'가 잘 맞아서였다. 막내 삼촌의 지인이 운영하는 카센터와 붙어있는 세차장을 그 집 아내 분이 직원을 두고 운영하고 계시다가 이젠 도저히 본인이 운영할 힘이 없다고, 세차하는 방법 등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주고 세를 놓고 싶다고 하시는 이야기를 듣곤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가 남편을 설득해서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어떤 일이던 함부로 뛰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돈에 관련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다소 충동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며 자신의 직감을 믿는 내 남편과 달리 나는 돈에 관련한 모든 것에는 호기심만 가지고 달려드는 성격이 아니다. 중학교 때 빚에 허덕이던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여든이 다 되어가는 연세에도 내 집 한 칸 마련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다는 내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돈에 관한 그 어떤 것에도 함부로 뛰어드는 성격이 아니다.

 내 남편은 나완 다르다. 어떤 일이 되었던지 몸으로 부딪혀보고 실패를 해봐야 다음번에 실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다양한 일들을 접해봐야 내 적성에 맞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믿는 남편은 처음부터 나와 달랐다. 쉽게 벌 수 있는 일과 어렵게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쉽게 버는 쪽을 택하지 않겠냐는 내 남편의 말을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전처럼 비난할 생각도 없다. 나와 가치관이 조금 다를 뿐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니까.

 어쨌든 힘든 일을 하기 꺼려했던 남편을 며칠 동안 설득해 한 달 동안 그 세차장에서 세차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그 한 달 동안은 월급을 받기로 하고, 세차하는 법을 익힌 후 그 세차장을 우리가 인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자리를 잡아놓은 곳이고 근방의 공공기관들(경찰서, 세무서 등)의 세차를 맡아하는 곳이니 세차하는 법만 몸에 익힌다면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처음 한 달은 죽을 만큼 힘들었다. 우리가 처음 그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2015년 5월이었다. 5월, 강릉의 날씨는 기온보다 송화가루와의 전쟁이었다. 소나무가 많은 강릉은 매년 봄철이면 집 안과 차량, 온갖 곳에 송화가루가 날린다. 잠시 환기를 시키려 열어놓은 창문으로 노랗고 뿌연 송화가루가 날리는 것은 보통이고 땀 비질비질 흘리고 들어온 아이들의 얼굴과 손을 닦아보면 송화가루 때문에 누런 물이 닦이기 일쑤다. 그러니 밖에 세워져 있는 차에는 오죽하겠는가. 면허가 없으니 당연히 차도 없던 내가 그렇게 징글징글하게 송화가루를 닦을 일이 있었겠나 싶다. 강릉의 봄은 송화가루와의 전쟁이다.

 면허 없는 나는 몰랐다. 차 안 쪽이 그렇게나 복잡한지.

 택시, 남편의 차, 친정아빠의 차. 타고 다니는 동안 차량 내부를 꼼꼼하게 볼 일이 없던 나는 그날부터 차종, 차종마다의 내부, 휠, 범퍼, 사이드 미러, 트렁크 등을 전부 살피는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차를 모르는 사람이 차를 익힌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면허라도 있었다면 좀 덜했겠지만 나는 서른넷인 지금도 면허가 없다. 남이 보면 바보 같은 엄마라고 욕할 일일 것이란 것도 알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면허를 따야 한다는 압박과 동시에 겁이 난다.

 난 그때 옛날 차량들 내부에 재떨이가 있는지도 처음 알았고 일명 '다시방'이라고 부르는 곳이 글로브 박스라는 엄연한 명칭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 나는 '다시방'이 진짜 '다시방'인 줄 알았다. 차량 내부의 모든 명칭을 익히고, 청소하는 법이 몸에 익을 때쯤 우리는 그 세차장을 인수했다.

 처음엔 우여곡절도 많았고 기존의 손님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우리 손님이 새로 생겨 예약을 받고 2-3시간이 걸려도 차를 세워두고 가는 손님을 볼 때면 내심 뿌듯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청소는 자신 있었다. 요리에 영 자신이 없던, 지금도 여전히 요리엔 자신이 없는 주부이지만 청소 하나만큼은 정말 자신 있었기에 선택한 업종이었다. 처음 인수를 받고는 차량마다 조금씩 다른 조작 방법에 가끔 빼먹는 곳이 생기곤 했지만 손님에게 직접, 혹은 남편에게 물어가며 익힌 뒤론 그마저도 빼먹지 않고 꽤 꼼꼼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내지 2주에 한 번씩 들어오는 남부지구대(소나타 LF, 아반떼 MD) , 동부지구대, 중부지구대 각 지구대의 순찰차와 형사과(스타렉스), 과학수사대(스타렉스), 여청계(모닝), 생활질서계(투리스모) 차량들을 닦으며 경찰서 분들과 어느 정도 안면도 익히게 되었다.

 세무서의 차량은 K7, 소나타 LF였고 MBC 방송국 차량은 제네시스와 싼타페 2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끔 YTN차량도 들어왔었고 담배회사 JTL(던힐, 메비우스[구, 마일드세븐])의 레이 차량이 3-4대씩 들어오기도 했다. 가까운 공업사에서 도색을 한 뒤에 차량 내부로 들어간 먼지나 이물질을 털어내고자 내부 세차만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비 오는 날엔 공업사나 순찰차 내부 세차가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으니 비 오는 날에도 손해는 아니었다. 우린 세차장을 하며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날 한 시에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둘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는 세차장을 다른 분에게 넘겼다. 자랑 같은 말이지만 나를 보고 오시던 손님들이 꽤 많았었는데 내가 둘째를 임신하게 된 후 내부 세차를 해주실 다른 아주머님을 구해 세차장을 운영했지만 내가 만든 손님들이 모두 세차장을 옮기는 일이 벌어지게 되자 내 남편은 세차장에서 손을 놓았다. 세차장을 그만둔 지 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마주치는 옛 손님들은 다른 곳에서 세차장 할 생각 있으면 꼭 연락 달라며 명함을 주고 가시는 일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세차장을 그만두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 남편은 세차장을 하기 전 다니던 회사로, 나는 엄마의 자리로.

 2019년 가을쯤, 남편은 그동안 모아뒀던 돈으로 장사를 했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남편이 전부터 그렇게 원하던 호프집이었다. 나는 사실 술장사에 맞는 성격은 아니다. 물론 옷가게에서 일을 하며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기술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 옷가게와 호프집은 전혀 다른 업종이지 않은가. 음식에 소질도 없고 자신도 없는데 게다가 술 먹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질색을 하자 남편은 12월이 되면 자신이 일하던 곳의 현장도 끝이 나니 딱 3개월만 내가 맡아해 주면 12월부턴 자신이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3개월이고 뭐고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하고자 했던 호프집은 심지어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그냥 순수 호프집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만들고 해내야만 하는 호프집. 그것도 단 한 달만에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그래, 프랜차이즈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건 심지어 내가 모든 안주를 연구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순수 호프집. 가뜩이나 요리에 자신도 없는 나보고 3개월만 맡아서 하라니.

 남편은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집 근처에 작은 호프집을 인수했다. 그리고 그곳에 돈을 쏟아부었다. 말릴 틈도 없었고, 말려도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안에 있던 모든 인테리어를 손수 뜯어내고 지인들을 총동원하며 갖고 있던 모든 돈을 거기에 쏟아부었다. 그래 봐야 겨우 2천만 원 남짓한 돈이었다.

 원래 있던 나무 목재를 모조리 뜯어낸 후 타일을 깔고 주방기구를 들여놓고, 거짓말 같겠지만 이건 겨우 보름도 안되어서 벌어진 일이다. 나는 그 사이 강릉에서 유명했던 구이 닭발집을 한 나의 고모에게 레시피를 전수받고 있었다. 우리 고모가 무려 19년을 한 가게의 레시피를 나는 단 보름 동안 배워야 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되는 일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질질 끌려다녔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학원 뺑뺑이를 돌듯 나는 오전에 가게 인테리어와 정리를 돕다 오후가 되면 고모의 레시피를 따라 닭발을 삶고 소스를 만들어 안주를 만들어보다 늦은 오후가 되면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이 모두 잠들면 남편과 바통터치를 한 후 다시 가게에 나가 다시 닭발을 삶고. 기계 같았고, 하기 싫은 일에 끌려다니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적어도 장사에는, 아니 요리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정성,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요리를 못할지언정 그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19년 동안 공들인 레시피를 단 보름 만에 배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고 가뜩이나 맛에 둔감한 내가 그 일을 한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이미 가게에 퍼부은 돈이 있으니 무를 수도 없었고 나 또한 울며 겨자 먹기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가게는 2019년 10월 3일 문을 열었다. 거짓말 같겠지만 그 해 9월 10일, 남편이 마음을 먹고 가게 계약을 함과 동시에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문을 연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이가 예상하겠지만, 잘 될 리가 만무했다. 닭발 맛은 매번 달랐고 음식 장사를 처음 해보는 나는 손님들의 피드백에 매번 흔들렸다. 우습게도 그러는 동안에도 손님이 한 테이블도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다.

 동네에는 이렇게 작은 호프집이 꽤 여럿이었는데 그때 내 나이가 겨우 서른, 서른 하나. 예쁘고 자시고 와 상관없이 내 나이가 겨우 그것밖에 안되었다는 것이 이 맛없는 호프집을 찾는 이유였다. (이건 손님들 입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동네에 모텔들이 많은데 연인들이 가는 숙박업소라기보다는 주로 타지에서 일을 하러 오셔서 장기투숙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동네에 술 한 잔 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며 내 아버지/삼촌 또래, 내 또래의 손님들이 소주 두어 병을 가지고 새벽 5시까지 버티는 날이 허다했다. 몸은 피곤하지만 돈은 안 되는, 시간은 가고 있지만 내겐 너무 지옥 같은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바쁜 고모를 수도 없이 불러 닭발 레시피를 고치고 또 고치고 장사가 되지 않아도 버티고 버티다 끝끝내는 오픈한 지 한 달 만에 온 몸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오른쪽 골반부터 무릎까지 저리던 통증이 날이 갈수록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오른쪽 몸통 쪽으로 저리기 시작했다. 정형외과, 신경과, 신경외과 모두 가 보았지만 디스크도 아니었고 신경 쪽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온몸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날이면 남편은 가게 문을 닫아버렸다.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 대신 가게를 운영해주겠다던 남편은 그냥 문을 닫아버렸다. 이건 그냥 애들 장난이었다. 사업 놀이,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돈만 퍼부어놓고 내게 가게를 떠맡긴 거였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맡은 바에는, 아니 적어도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가진 돈 전부를 투자했던 만큼은 거둬들이고 싶었고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가게를 말아먹었다는 소리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서 늦게나마 가게를 열어 악착같이 버텨온 나완 관계없이 내가 아프면 가게 문을 닫아버리는 남편을 보며 나는 아예 손을 놓았다.

 애초에 네가 벌린 일이니 네가 책임지란 뜻이기도 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날 내버려 두었으니 나는 이제 모르겠다는 심보였다. 나는 못되고 무책임했고 남편은 앞뒤를 재지 않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1월 즈음 현장 일이 끝난 남편은 이 호프집만으론 유지를 하지 못하겠다 싶어 한 프랜차이즈 떡볶이집을 샵인 샵으로 들였다. 물론 어느 정도 괜찮아진 나도 남편이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가게 일을 도왔다. 떡볶이 프랜차이즈를 가져오자마자 코로나 시국이 터졌고 처음엔 잘되나 싶던 배달도 잘되지 않았다. 음식점을 운영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값/유지비가 얼마나 드는지, 내 순수익이 얼마나 되는지, 잘 운영되고 있긴 한 건지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정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하루 벌어 배달비/재료비 등을 모두 제외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을 만큼 엉망으로 운영하고 있던 우리는 오픈 1년 만에 가게를 접었다.

 남편은 지금도 장사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다. 내가 미련이 없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듯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괴로웠고 아무 준비도 없었던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아서다. 어쩌면 책임지지 못했고, 회피하고 싶었고, 하기 싫어했던 내 못난 모습들이 싫어서겠지만 진짜 이유는 나는 다시 그 일들을 생각하는 것조차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자신 없는 일을 하는 것보다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열정이 없었던 나를 생각하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어서.

 갖춰진 곳에서 한다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성공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과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 그것을 잘 구별할 수 있는 능력. 나는 잘할 수 있는 일만 하려 했고 최선을 다해야 했던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백종원 님이 와서 쌍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장사는 소꿉놀이도 아니고 남이 하는 것을 보고 잘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 내가 하지 못한 그것을 누군가는 잘 해냈으면 한다.

 잘하는 것과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그것을 잘 구분하는 것도 어른의 능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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