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닮다 Jan 19. 2022

김밥집이나 차려볼까?

장사가 애들 장난이야?


우리 친정 할머니는 김밥을 싸실 때 속재료가 생식 수준이다.

김밥햄 대신 분홍 소시지를 길고 가늘게 김밥김 길이에 맞춰 자르고(심지어 익히지도 않는다), 오이도 김 길이에 맞춰, 단무지, 맛살, 시금치, 달걀지단 이게 끝이었다. 여기까진 무난한 김밥 재료 같겠지만 시금치는 살짝 데쳐 무치고 달걀지단만 부치고 나면 익히는 재료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때 세상 모든 김밥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줄 알았다. 어딘가 모르게 맹숭맹숭한 김밥이었지만 늘 먹어왔던 김밥이 그런 식이었어서 이상하다고 느껴보지 못하다가 6학년 수학여행 날, 새벽부터 잡힌 굿판에 학교 앞 작은 구멍가게 같은 김밥집에 김밥 3줄을 예약해뒀으니 네 이름 대고 가지고 가란 할머니 말씀을 듣고 학교 정문 바로 맞은편에 있는 김밥집에 도시락을 가지러 갔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할머니 김밥보다 훨씬 맛있는 김밥이 존재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똑같이 분홍 소시지와 오이가 들어간 김밥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맛이 다를 수가 있지? 적당히 짭조름하고 익힌 분홍 소시지에서 나던 특유의 밀가루 맛이 내겐 너무 신세계였다. (논외로 익히지 않은 분홍 소시지 드셔 보신 적 있으신지.. 분홍 소시지 특유의 밀가루 맛을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는데 나는 그 맛에 먹어왔지만 익히지 않은 건 정말.. 분홍 소시지 좋아하는 쓴이도 먹기 싫어지는 식감이다. 퍽퍽하고 푸석거리고, 생 밀가루를 한주먹 욱여넣은 느낌.)


그 뒤로 죄송하게도 할머니 김밥을 먹지 않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만든 맛에 빠진 건지, 진짜 그 김밥집 할머님 솜씨가 좋으셨던 건진 몰라도 아이들이 먹기 좋게 얇게 썰어 만두 포장용 스티로폼 박스에 쪼르륵 줄 세워 주시던 분홍 소시지 김밥은 바쁜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그 김밥집도 문을 닫았고, 떠도는 소문으로는 김밥집 할머님께서 허리를 다치셨다더라 돌아가셨다더라 등의 카더라가 한동안 이 동네에 떠돌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턴 도시락보다 몇 푼 쥐어진 돈으로 수학여행 가는 길, 잠시 들린 휴게소에서 핫도그 등을 사 먹는 것으로 김밥의 빈자리를 대신 채웠고 한동안 김밥을 사 먹을 일이 없었다.


스물두 살, 함께 맞는 남자 친구의 첫 생일. 멋진 이벤트를 해주겠단 생각으로 집 김밥을 좋아한다던 그의 말에 생애 첫 김밥을, 그것도 우리 할머니 방식으로 싸 줬을 때 남자 친구의 반응은 '???'였다. 세상에 이렇게 맛없는 김밥이 또 있을까 싶은 표정, 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표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꾸역꾸역 맛있다고 다 먹어치우는 남자 친구를 보며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그때의 남자 친구가 현재의 남편이 되고, 결혼 후 시어머님께서 김밥 재료를 준비하시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맛살을 길이대로 잘라 작은 티스푼의 반절 정도 간장을 넣어 달달 볶고, 김밥용 햄도, 어묵도 모두 그렇게 익혀 준비해두시고 대신 밥에는 참기름과 미원만 약간 넣어 간을 하셨다. 온 재료에 저렇게 간장을 넣으면 김밥이 짜지 않을까? 그런데 웬걸? 적당히 짭조름하고 게다가 분홍 소시지가 아닌 햄을 넣으니 한층 감칠맛이 더해졌다. 이게 MSG의 마법인가 싶었다.


그 후, 내 김밥도 어머님의 비법대로 만들어졌고 이젠 응용기술까지 접목하게 되었다.


결혼 후 어머님 레시피대로 첫 김밥을 쌌던 날. 어쩐지 어설퍼보였던 내 김밥말이 기술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모양이 다소 어설프긴 했지만 참치를 넣어 참치김밥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계속해서 옆구리가 터지던 김밥을 어떻게 하면 옆구리 터지지 않게 할까 연구까지 해가며.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꼬마김밥, 남은 밥으론 유부초밥으로 응용했다.



아빠를 닮아 김밥 귀신이 된 큰 아이 어린이집 도시락에 그렇게 원하는 김치 멸치 김밥까지 싸줄 경지에 올랐고,


생활의 달인에서 나온 경주 계란 김밥을 보고 계란을 잘게 썰어 폭신한 계란 김밥을 만들어보기도 했으며,



김밥을 말며 떡볶이를 만들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음식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고, 그만큼 난 요리에 'ㅇ'자도 모르던 주부, 엄마였다.

이제 11년 차 주부,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게 됐고 혼자 제사상도 차릴 수 있다. 다 닥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 해봐서 몰랐던 것일 뿐.


남편은 가끔 제주에서 오시는 어머님이 싸주신 김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엄마 김밥이 최고라던 아들이 그 11년 사이 당신의 레시피를 따라 하고 응용하며 만든 며느리 김밥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아시는 날엔 외아들에 대한 배신감이 엄청나실지도.



팔불출 같은 남편의 와이프 김밥 자랑에 친정식구들과 삼촌들 도시락까지 싸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요샌 한 번 쌀 때마다 30줄씩 싸게 되는데, 사실 이게 보통 일은 아니다. 재료값도 재료값인데 여기에 드는 노동력이 어마어마하다. 먹는 사람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가끔 친정아빠나 삼촌들, 사촌동생들이  "미소야, 나도 김밥." , "언니, 나도 낼 김밥 2줄 : )" 하며 맡겨둔 것처럼 얘기할 때마다 미친년 널뛰듯 소리 지르고 싶지만 할머니를 닮아 퍼주는 거 좋아하는 나는.. 입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김밥 재료를 사러 간다.



아드님들 소풍 땐 두말할 것도 없이 김밥이고,



친정 식구들 몫의 김밥까지.

내가 김밥 싸는 날은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날이다. 내가 너무 피곤해지는 날이라. 김밥 싸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린다.


30줄도 1시간 반이면 뚝딱 싸는 내가 기계 같아 보이는지 가끔 날 보며


"김밥집이나 할까? 우리 마누라 김밥 대박 날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하며 썰지도 않은 김밥을 우적우적 씹어대는 남편을 한 대 치고 싶지만 아직 김밥을 싸고 있는 내 손이 너무 바빠서 그저 흘겨보고 만다.

이게 쉬워 보이나? 먹는 사람이야 다 만들어진 걸 먹으니 모르지, 이게 얼마나 진 빠지는 일인데.


"음식장사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데."

"그래도 자긴 손 빠르잖아~"

"30줄이고, 내 식구들 먹는 거니까 대충 싸도 되는 거지. 돈 받고 파는 걸 이렇게 내보낸다고? 망할 일 있냐."



하면 할수록 스킬은 늘고 있지만 장사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아이들이 먹을 거라 옆구리 터트리지 않고 얇게 써는 것도 그저 내 아이들이 먹는 거니까 터득한 것일 뿐, 이걸로 장사를 하겠다면 더 피나는 노력에 있어야 할 텐데 난 그럴 재주가 없고 체력도 없다.

김밥은 그냥 집에서 가족들과 먹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한 달 뒤에 남편 생일이라 그때 또 30줄은 싸야 할 텐데, 그전까지 체력을 비축해두기로 한다.

당분간 김밥, 안녕!




작가의 이전글 소수의 구독자를 가진 작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