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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Nov 12. 2023

ADHD 아들과 엄마가 살아가는 법. 2

경계성 불안장애와 작은 학교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 걸까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ADHD라는 것을 알게 된 8살 때부터의 일들을 처음부터 다시 장황하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아지고 있는 현재를 적어내려야 할까.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나는 처음부터 설명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야 현재의 아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말이 늦었다. 엄마인 내가 말 수가 많지 않은 탓에 아이에게 말을 많이 걸지 않은 것도 문제였고, TV를 많이 보여준 것도 문제였다. 특히나 말을 하지 않는 만화, 예를 들어 '라바'나 '그리지와 레밍스' 같은 것들. 아이가 유독 재미있어하니 보여주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만 보이는 것들이 꽤 큰 후유증을 낫기도 했다. 아이는 말을 하지 않은 채 행동을 하는 만화 자체를 따라 하고 있었다. 제대로 말을 하기 시작한 건 5살 생일이 훨씬 지나서부터였다. 그조차도 발음이 명확하지 못하고 통문장을 말하지 못해 어린이집 친구들과 소통하는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문제는 7살이 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전에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좀 부산스러웠던 행동들이 이젠 폭력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자기 뜻대로 의사가 전달되지 않아 오해를 사게 되거나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가 생기면 아이들을 때리거나 물기도 했다. 보통 4-5살이면 사라지는 신체적 표현법이 7살인 아이에게서 여전히 보이고 있는 상황. 그로 인해 선생님들도 난감해지고, 같은 반 엄마들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수업시간에 단 한 시도 앉아있지를 못했고 발표를 시키면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단순히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아이 자신도 말하기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 입학하면 괜찮아지겠지, 단체 생활을 하며 규칙을 접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아이가 입학하던 그 해 1월 코로나가 터졌고 아이는 5월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입학식을 했다. 코로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서로가 조심해야 했던 그 시기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접촉을 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학교에 나간 날보다 방학을 포함해 나가지 않은 날이 더 많았고 한 학기 중 한 달 반 정도 출석을 한 게 전부였다.

 보름동안 학교를 나갔다가 남은 보름은 원격수업을 받아야 했던 상황, 다시 학교에 나가는 날이면 아이는 늘 풀이 죽어 돌아왔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학교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아이들의 수업을 방해해요. 그래서 자리를 제 앞으로 옮겼어요."

 선생님 딴에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를 통제하고자 옮긴 아이의 자리,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이가 자리를 옮긴 것에 대해 선생님과 가까워지는 특혜로 생각했고 그것은 곧장 학부모들의 항의로 이어졌다. 도저히 이대로는 학교생활이 어려울 것 같아 그 해 6월, 신경정신과에 아이를 데려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결국 우려하던 것처럼 경계성 불안장애, 경계성 ADHD라는 결과를 받았다. 즉, 불안으로 인한 ADHD라는 것이었다. 신경정신과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메디키넷 20, 언제까지 먹어야 할지 모를 약을 처음으로 받아 든 순간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이에게 화가 났던 것은 아니다. 그저 엄마인 내가 조금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던 것, 아니 알면서도 아닐 거라 외면하고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 화가 났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그 후부터 심리치료도 함께 병행을 하게 되었고, 단체생활을 하는 학교에 적응을 시키는 것이 가장 첫 번째 문제였다. 수업 시간에 앉아있지 않는 것,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제쳐두고 다른 아이들의 책상에서 기웃대며 수업을 방해하는 것, 그로 인해 친구들과 잦은 다툼을 일으키는 것. 이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심리 치료 선생님과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아이의 충동성을 억제하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책상에 앉아있게 함으로써 아이들의 수업이 방해받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들을 담임선생님과 의논했지만 담임선생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건 아이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예요. 다른 아이들은 공부를 하는데 아이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특혜가 됩니다."

 담임선생님의 말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른 아이들이 수업을 방해받게 되고 아이를 향한 친구들의 시선 또한 곱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반이 하나밖에 없는 작은 학교에서 낙인찍히는 순간부터 아이는 고립되고 말 것이다. 우선 그것만이라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그 어떤 것도 허용해주시지 않았다.

 "지금도 아이만 제 앞에 앉아있다고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어요."

 그 말에 심리상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 임의로 바꾸신 자리로 인해 특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자리를 바꾸는 것에 '아이'도 동의를 했나요? '아이' 입장에서는 감시당하는 기분일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곱지 않은 시선이란 걸 아이도 알고 있는데 선생님께 감시당하는 느낌까지 든다면 아이는 더더욱 겉돌 거예요. 자리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주시되, 아이들의 시선이 많이 닿지 않은 곳에서 그림 그리기를 한다면 덜 부담스러울 겁니다. 아이는 지금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아이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앞자리에 앉히시는 건 아이의 불안을 더더욱 가중시키는 거예요."

 심리상담 선생님의 말에 나이 지긋한 담임선생님은 얼굴을 찡그렸다. 본인의 교육적 신념에 누군가가 문제 제기를 해오자 마음이 매우 상한 듯했다. 그런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상담선생님보다 더 많은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지켜봐 오셨을 텐데 그런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러웠고, 늘 죄송하다며 부탁드렸다. 하지만 늘 죄송하다는 나의 태도에 선생님은 더더욱 날을 세웠다.

 "저는 그렇게 해드릴 수가 없어요. 아이를 의자에 묶어서라도 앉아있는 법을 가정에서 익혀주도록 하세요."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게 그 해 10월의 일이었다.

 '의자에 묶어서라도'라는 말이 그렇게 가슴에 맺힐 수가 없었다. 아직 1학년이라 등하교하는 길을 배웅하고 마중할 때마다 그 작은 학교에 퍼진 아이를 향한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시선, 아이들의 수군거림. 처음엔 피해의식인 줄 알았던 나의 생각이 그 해 가을이 되자 아주 노골적인 사실이 되었다. 아이를 마중하는 나를 볼 때마다 담임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은,

 "아이고 우리 유명한 '아이' 이제 집에 가는구나?" 하며 웃었고 나와 함께 아이를 기다리던 학부모들은 각자의 아이를 맞이하며 '오늘도 가만히 있지 못한' 내 아이를 손가락질했다.

 "엄마, 쟤가 걔야."

 그 소리에 엄마들은 흘긋 나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작은 학교에서 아이와 나는 계속해서 고립되고 있었다. 이런 시선으로 6년 내내 한 반으로 올라갈 내 아이를 생각하니 도저히 자신이 없어졌다. 1학기와 2학기를 포함해 학교에 나간 날이 3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상담선생님과 상의 끝에 전학을 결심했다. 전학으로 모든 것이 변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전에 내 아이의 행동을 고치는 일이 먼저였지만 나는 전학을 결심한 11월부터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가정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집에서 계속해서 아이의 행동을 가르쳤다. 상담선생님께 배운 그대로 소리 내어 책을 읽히고 일기를 쓰도록 가르쳤다. 일기의 내용이 무엇이 되었던, 몇 줄이 되었던 관계없이 계속해서 아이에게 꾸준하게 '무언가' 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무언가가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책을 읽히고 함께 책을 읽고 보드게임을 가져와 게임의 규칙을 익히고 친구들과 노는 법을 가르쳤다.

 한 달에 한 번은 오로지 '아이'와 함께 하는 하루를 보내며 극장에 데려가 앉아서 영화를 보는 법, 카페에 앉아 음료를 다 마시고 일어나는 것, 함께 나갈 땐 손을 잡고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 것 등을 가르쳤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육아라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더 편했다. 그렇게 두 달이 흐르고 겨울방학식이 시작되기 며칠 전, 아이를 등교시켰을 때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변화가 놀랍다고 했지만 끝끝내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남겼다.

 "끝날 때 되니까 잘하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해주지 그랬어~"

 그날 나와 아이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15분 동안 거리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라는 말이 가슴에 꽂힌 아이는 나를 앞서 걸으며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죽여 울고 말았다. 우리는 그렇게 도망치듯 그 작은 학교를 떠났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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