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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Jul 23. 2024

공무원에게 책임감이란

초임 사무관 때였다. 내가 총괄하는 기금으로 여러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었다. 기금을 총괄한다고 해서 모든 사업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고, 사업 중에는 다른 부서에서 집행하는 사업도 있었다. 기재부나 국회에서 종종 기금과 관련하여 자료를 요청했는데, 기금 총괄인 내가 다른 부서에서 작성해 보내준 자료까지 취합해서 과장님께 검토를 받고 제출했다.


어느 날 과장님은 자료를 보더니 기금 사업에 관해 물었다. 난 내가 담당한 사업들은 쉽게 대답할 수 있었지만, 다른 부서의 사업은 명확히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과장님은 나에게 혼을 냈다. 다른 부서에서 자료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취합했다면 최소한 그 내용은 다 알아야 한다며, 총괄로서 책임감을 더 가져라고 했다. 솔직히 당시엔 수긍하기 어려웠다. 내 사업도 아닌데 어떻게 내가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그 후로 내가 취합한 자료는 (내가 작성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작성한 거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이해하면서 책임감을 가지려고 했다.



일을 하다 보면 민감한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한 번은 그런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다가 의도하지 않게 관련 단체에 누출된 적이 있었다. 자료를 본 사람들은 청사로 찾아와 보고서 내용을 항목별로 하나씩 반박하면서 도대체 작성자가 누구냐고 따졌다. 화가 잔뜩 난 사람들에게 차마 내가 적었다고 말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과장님이 나서더니 자신이 작성한 거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과장님께 화를 내며 소리를 쳤고, 과장님은 십자포화를 혼자 맞았다.


엄밀히 말하면 보고서의 초안은 내가 작성했고, 과장님, 국장님, 그보다 상위 직급 검토자들의 피드백을 받아 수정도 내가 했다. 내 입장에선 내가 작성한 것이다. 그렇지만 과장님 입장에선 자신을 거쳤으니 자신이 작성한 것으로 본 것이다. 과장님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그 모습은 아직까지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공직생활 동안 그런 상사들을 보면서 배웠기 때문에 나랑 함께 있었던 주무관님이 쓴 자료도 내 책임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주무관님이 썼지만 내가 미처 못 본 자료까지도 그랬다. 예를 들면, 내가 담당하는 지원사업 선정 위원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위원회 도중에 과장님께서 사업별 검토 내용이 담긴 위원회 안건 자료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에게 알렸다. 확인해 보니 최신 검토 자료가 아니라 예전 버전의 자료였다. 


안건을 인쇄해서 회의장에 배치하는 일은 사실 주무관님의 업무였다. 주무관님이 실수로 최신 수정 사항을 반영하지 않고 인쇄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배치된 자료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 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위원회 중에 무례함과 쪽팔림을 무릅쓰고 '제가 실수로 자료를 잘못 인쇄했다'며 검토 자료를 새로 뽑아 드리겠다고 했다. 당연히 위원회가 끝나고 누구에게도 주무관님의 실수에 대해선 절대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렇진 않다. 어떤 국장님은 예전에 본인이 했던 결재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 당시 결재했던 문서를 나보고 가져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모든 업무를 기억할 순 없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불과 몇 달 전에 결재된 내용을 보면서도 자신은 이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당시 결재를 상신했던 담당 사무관을 불러서 왜 이렇게 결재가 된 거냐라며 나무라는 모습까지 옆에서 지켜봤을 땐 불편함을 느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상신하는 실무자가 그 내용을 가장 잘 안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결재 라인에 있는 과장님이나 국장님이 본인은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거나 당시에 바빠서 미처 제대로 못 봤다며 그 보고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내가 공직에 첫 발을 들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배운 것과는 좀 달랐다. 


혹자는 총괄이라서 또는 상사라서 자기를 거쳐가는 모든 내용을 다 알아야 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보고서를 작성하든 검토하든 최선을 다해서 할 것이고, 나중에 그게 문제가 되더라도 당당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선 주로 보고서를 들었지만, 공무원으로서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는 책임감을 가지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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