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사무관일 때 과장님이 민원인을 상대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민원인도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고 걸다가 이렇게 중앙행정기관의 사무관에게까지 걸게 된 거라며, 나는 그들의 말만 잘 들어주기만 해도 대부분의 민원이 해결될 거라고 하셨다.
그 후로 난 민원 전화는 몇십 분이 걸리더라도 먼저 끊지 않고 말을 들어주었다. 그냥 듣는 경우도 있고, 궁금한 걸 찾아주기도 했으며, 직접 청사로 찾아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진심으로 그들의 말에 공감하며 대했는진 장담하지 못하겠다. 생각해 보면 영혼 없이 학습한 대로 행동한 것 같다. 그 정도만 해도 민원인들이 만족했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목디스크가 심해져서 추간판성형술(시술)을 받았는데, 그 후 목 안쪽이 아프기 시작했다. 시술받기 전에도 손이 저린 증상은 있었지만 아프거나 하진 않았는데, 안 아프던 곳이 아프니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지만 큰 문제가 아니라며 시술을 받으면 아플 수 있다고 했다. 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아프다면 어디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을 물어봤지만, 원래 그런 거라며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통증이 점점 커졌고, 너무 참기 힘들어서 결국 서울에 조금 더 큰 병원으로 갔다. 거기서도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시술받은 데가 아플 수 있다며 똑같은 대답을 했다. MRI라도 찍어보자고 했는데, 의사는 그래봐야 달라질 것도 없다고 돈만 날리는 거라고 말렸다. 난 서울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다며 사정사정을 했고, 의사는 찍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정 원한다니깐 (한숨을 쉬며) 찍어 보자고 했다.
MRI를 찍고 그 결과를 본 의사는 당황해했다. 나에게 미안한 어투로 척추와 디스크 쪽에 감염 또는 염증 가능성이 있는데, 자기 병원에선 검사랑 치료를 할 수 없으니 당장 대학병원에 가서 입원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입원 후 정밀 검사 결과 감염이 있었고, 보통은 수술을 해야 하지만 다행히 일찍 발견되었기에 수술 없이 항생제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때 난 많이 아프다는 나쁜 결과를 들었음에도 내 억울함이 풀렸다는 것에 만족했다. 여러 차례 심각하게 아프다고 말했지만, 의사들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물론 아프다는 건 환자에 따라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환자의 말을 일일이 들어가며 치료 방향을 잡을 순 없다는 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환자의 말을 귀담아듣는 척이나 공감한다는 행동 없이, 퉁명스럽게 원래 그런 거라고 할 것까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막상 내가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공무원으로서 그간 대했던 민원인에 대해 난 어떻게 했는지 되짚어보게 되었다. 황당한 말을 하는 민원인에게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진 않았는지 반성했다. 한숨을 쉰다거나, 중간에 말을 끊는다거나, 헛웃음을 친다거나 하지 않았는지... 또는 그들의 진지함을 너무 형식적으로 대하진 않았는지도 걱정됐다. 직접 당해봐야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민원인을 대할 때 주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