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면접과 관계된 사항은 보안상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기 때문에, 면접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들만 몇 가지 남기려고 한다.
#1 책임감
행정고시 면접 준비 이후 오랜만에 공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사람마다 다양한 가치들을 꼽겠지만, 나는 책임감을 택하게 되더라. 10년 정도 일을 하면서 보니 책임감 없이 일하는 공무원들이 예상보다 많았고, 그에 실망하는 일도 적지 않았기 때문인 거 같다.
유학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유학을 지원하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나 스스로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우선이었다. 그런데 면접을 준비하면서, 공무원으로서 책임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받아서 단순히 나 하나 잘살자고 유학을 다녀오는 게 맞나 싶었다. 그래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정책에 보탬이 되는 연구 결과물 하나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면접용 답변으로 만든 말이었지만, 머릿속으로 입 밖으로 수십 차례 되뇌고 말하다 보니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다. 그래, 까짓 거 AI 법 전문가로 돌아와서 국무회의에 올릴 안건 하나 만드는 걸 목표로 연구해 보지 뭐. 이 말이 3년 후의 나에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공중에 내뱉고 나면 뭐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적어둔다. 미래의 나에게, 미안해.
#2 약점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면접을 하게 되면 꼭 누군가는 악역을 하고 싶은가 보다. 배드캅이 되어서 압박 질문을 하는 분이 생긴다는 말이다. 과거 유학 면접을 경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압박 질문을 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고, 이걸 어떻게 잘 넘어갔는지에 대한 경험담이 꽤 큰 도움 되었다.
나의 경우에는 일부러 약점을 남겨뒀다. (정확히는 약점이 될 것 같은 걸 사전에 차단하지 않고 전략적으로 내버려 뒀다) 그러고는 면접관이 그 약점을 깊게 파고들 걸 대비해 준비를 철저히 했다. 약점은 미국의 수많은 대학 중에 왜 Emory 대학에 지원하는지였다. UC 버클리나 예일대, 시카고대 같은 대학들은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만큼 유명하지만, 에모리 대학은 주변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생소한 대학이다. 사실 나도 유학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대응 방안에 꽤 신경을 썼다. 이 대학을 알게 된 건 내 연구 주제(AI가 공공행정에 도입될 때 사회적 수용성을 높일 수 있는 법제도적 연구)와 관련 있는 연구가 에모리 대학의 AI.Humanity Initiative라는 학술단체에서 적극적으로 수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내와 같이 갈 조지아주 안에 있다는 점도 현실적으로 중요한 이유긴 했다. 하지만 진짜로 이 대학에 1순위로 가고 싶어서 가장 먼저 입학 문의 메일까지 보낸 상태이다.
어쨌든, 대답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AI.Humanity Initiative에서 활동하는 교수와 그 이력, 2023년부터 올해까지 AI나 공공행정과 관련된 세미나, 콘퍼런스랑 그 발표 내용, 최근 활동 내역까지도 검색해서 찾아보고 줄줄 외웠다. 챗지피티랑 퍼플렉시티 덕분에 가능했다.
아쉽게도 “왜 굳이 에모리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의 질문이 나오지 않아서 대답을 써먹진 못했지만, (대신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압박 질문이 들어왔고, 결과적으로 내가 합격한 걸 보면 대답은 괜찮게 했나 보다) 그래도 내 훈련계획의 약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는 미리 분석을 해둔 덕에 마음 편히 면접장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3 AI 전쟁 2.0
연구 주제가 AI와 관련되다 보니, AI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책을 여러 권 읽었다. 특히, 하정우 수석의 가장 최근 책인 AI 전쟁 2.0을 골라 7~8 회독한 것 같다. 최근 AI 산업의 동향, 세계 여러 나라별 AI 대응 전략, 우리나라의 문제점과 향후 정책 방향 같은 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도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프로그래머로 일했다고는 하지만, 10년 동안 프로그래밍을 손 놓고 살았기 때문에 이젠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민망스럽다. 그래도 인문대 출신의 행정직 공무원들 중엔 AI에 대한 지식이 나름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AI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내가 아는 게 전혀 없고, 알아도 정말 피상적으로 알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게 하나 있다면, 메타인지 능력인 거 같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건, 좀 하는 편이다.
원래라면 AI 전쟁 2.0을 한 번 읽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머릿속에 남는 게 하나도 없었기에 다시 읽었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한 5번 넘어서야 그나마 그 책에 있는 내용을 말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제야 내가 이 연구를 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췄단 안도감이 들었다. 도대체 그전에 나는 AI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융합형 인재라면서 떠들었던 걸까 싶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분명 내가 민간에서 프로그래머로 일을 할 때는 내가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을 했다. 프로그래밍 책도 찾아보고, 영어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공무원이 되고는 하는 일만 잘하자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변화에 둔감했다. 지금 하는 업무와 관련된 게 아니면 자기 계발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AI로 세상이 극변하고 있는데도, 세종시의 잔잔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였다고 혼잣말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이번에 미국으로 나가는 건 그동안 안이하고 안주하던 나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법 좀 할 줄 안다고 우쭐대지 말고, 우물 밖으로 나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인지 견문을 넓혀야겠다. 내 나이 50이 다 되어가서야 배움의 의욕이 넘치는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젊음이 부럽다.
유학 면접을 준비하는 것은 단지 합격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국가 지원을 받아 유학을 다녀올 자격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만큼 진지하게 준비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준비 자체만으로도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 든다.
내가 유학을 준비한다는 글을 썼을 때만 해도 아내는 걱정했다. 결과도 나오기 전부터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면 나중에 떨어졌을 때 민망하지 않겠냐고.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설령 떨어졌다 하더라도 내가 성장한 걸 느꼈다면 이와 비슷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남들에게 설득력은 좀 더 떨어졌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