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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Dec 06. 2021

카세트 테이프

X세대의 예전 #1

중학생이 되었다. 부모님께서 진지하게 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사주시겠다고 하길래 나도 진지하게 (용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을 만한 비싼 것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중학생으로서 앞으로 영어 하나쯤은 제대로(?) 해야 할 테니... 워크맨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고, 얼마 안 되어 나는 손바닥 크기만 한 워크맨을 책가방에 넣고 헤드폰을 휘날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당당한 중학생이 되었다. (유선 이어폰 아니고 머리띠처럼 쓰는 헤드폰이라고!)


친구들은 모이면 서로의 워크맨이 더 얼마나 작은지, 배터리 갈아 끼우기는 얼마나 더 쉬운지, 디자인은 누구의 것이 더 예쁜지, 소니가 나은지 아이와가 나은지를 지겹도록 견주어보며, 내 것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들 중에 가장 비싸고 가장 최신의 것인, 바라만 봐도 흐뭇한 그 물건을 세상 소중하게 애지중지 했던 기억이 난다.


...


(금방이라도 글로벌 시티즌이 될 줄 알았던 부모님의 기대를 뒤로하고) 중학생이 된 여학생들은 개학 첫날부터 서로 좋아하는 가수를 이야기하고 노래 테이프를 주고받으며 마치 다 자란 어른 흉내를 내며 능숙하게 감성 교류를 시작했다. 나는 이승환을 좋아한다고 했고, 성숙해 보이는 다른 한 친구는 윤상을 좋아한다고 했다. 여학생들이 음악 이야기로 서로의 문화를 향유할 때, 남학생들은 교실의 지형물을 활용하며 술래잡기하느라 빙글빙글 한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에 참으로 정신 사납다며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라며 절레절레했던 기억도 또렷이 난다.


워크맨이 생겼으니 당연히 카세트테이프 수집에 열성을 다하게 되었는데, 학교 교문 앞에는 늘 복사 테이프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학생이라 용돈이 빤-한데 물론 정품 테이프를 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정품의 삼분의 일 가격만 주면 살 수 있는 학교 앞 테이프에 자주 마음이 뺏겨 열심히 테이프를 사 모았다. 보이즈투맨과 머라이어캐리를 투톱으로 다양한 팝 음악을 처음 접하고 따라 부르고 흠뻑 빠졌던 그 시절의 음악이 지금의 나의 취향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때는 원하는 곡을 딱 찾아 듣기가 힘들어서 (테이프를 계속 돌리고 다시 반대로 돌리고를 몇 번이고 해야...) 그냥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쭈욱 한 번에 듣고, 그렇게 A면을 들으면 또다시 B면을 쭈욱 한 번에 듣는 감상법을 할 수밖에 없어서인지... 첫 곡의 선택이며, 곡의 배치 순서며, 마지막 곡이며, 많이 고민했겠구나... 그래서 그걸 듣는 나도 만드는 사람들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엄청나게 의미부여를 하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첫 곡을 이 곡으로 한 것으로 보니 앨범의 첫인상을 산뜻하게 시작하고 싶었나 보구나, 이 곡으로 분위기 전환을 하려는 거구나, 앞 곡과 이 곡은 이렇게 이야기가 연결되는구나, 장엄하게 끝내는 이런 마무리는 너무 멋있다...' 등등등


또 하나 떠오르는 기억은, 뭐니뭐니해도 자체 제작 앨범이다. 단어만 보면 엄청 거창한 스튜디오 제작 정도 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 너무 간단하다. 공 테이프를 사다 놓고 워크맨에 끼워 넣은 다음, 매일 듣는 라디오 프로에서 디제이가 곡 소개를 끝나고 음악을 틀어줄 때! 재빠르게 녹음 버튼을 눌러 한곡 한곡을 그야말로 한땀 한땀 녹음하여 나만의 앨범을 만드는 것이다. 제일 속상할 때가 디제이의 곡 소개가 너무 늦어 녹음 버튼을 누를 타이밍을 놓친다던지, 혹은 디제이의 말소리가 음악에 섞여 들어간다던지, 음악이 마지막까지 다 나오지 않고 광고 때문에 희미하게 잘린다던지 하는 경우에는 에라이.. 다시 녹음해야 하므로 세상 진지하고 심각하게 인상 써가며 녹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지우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은 오롯이 나만의 취향이었고 그래서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결과물이었고, 그래서 가끔은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고, 또 어쩌다가 그런 선물을 받는 경우에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서투른 글씨로 테이프의 표지에 곡과 가수의 이름을 적어 내려가는 소중한 순간 또한)


...


정성을 들여 취향을 만들어 나가고, 음악을 다양하게 접하고 싶어 이리저리 라디오 채널을 돌려가며 귀 기울이고, 무엇이든 일단 좋아해 보기로 맘먹었던, 그때 그 시절의 음악에 대한 나의 순수하고 소중했던 마음이 요즘 가끔 그립기도 하다. 너무나 손쉽게 원하는 음악을 찾고, 그 음악만 듣고, 금방 싫증내고, 또다시 음악을 찾는 마치 쇼핑처럼 음악을 즐기는 지금의 나는 뭔가 하나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 가끔 든다.


이젠 고장이 났는지 배터리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는 내 워크맨은 아직도 내 책상 서랍에 고이 누워있다. 라떼는 말야... 음악은 이렇게 말이지... 말할 때를 대비해서 이번 주말에는 살포시 한번 작동시켜 봐야겠다.


-오늘의 BGM. End Of The Road, 보이즈투맨


21.12.06 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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