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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Feb 19. 2024

인문학적 과제

이 시대에 인문학이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 <Composition VIII>(1923)

  학문을 하는데 정석적인 방법이란 아마 없을 것이다. 정석에서 벗어난 그 방법이 때로는 학계를 뒤집어엎을 만한 혁신을 가져오기도 하며, 정석이 있다면 과연 그게 학문이 맞을까, 기술이라는 표현이 더 낫지 않을까? 학문은 마치 예술과도 같다.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며, 세상을 해석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있는 존재자는 그 변화를 체감하고, 영위한다. 예술과 학문의 차이는 감성적인 것이냐 혹은 이성적인 것이냐의 문제일 것이다. 감성학인 예술에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성적인 학문에 정답이란 있을 수 있다. 1+1=2은 당연한 정답이 아닌가.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서 칸딘스키의 작품이 반드시 명화여야 할 필요가 없다. 그건 감성의 영역이다. 기호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며, 개인적인 것이다. 


  학문의 방법.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공부와 학문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다. 뇌피셜인데, 공부는 기존의 것을 습득하는 것이며, 받아들이며, 비판하는 과정을 말하며, 학문을 한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이론을 창안해 내거나, 논문을 작성하는 등 자신만의 학술적 성과를 내는 것을 말한다. 대학원 과정까지 하는 게 아마 공부일 것이고, 그다음이 학문일 것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지는 않았지만, 대충 그러한 분위기더라. 기존의 언어를 익혀야 자신만의 문장도 쓰고, 문학을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학위과정이라 함은 자신의 문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타자의 문법을 익히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자신만의 학문적 방법을 창조해 낸 푸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서 자신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만들어낸 마르크스 등 수많은 학계의 거장들은 고전을 공부하고 익힘으로써 자신만의 이론과 학설을 정립했다. 그들은 선대의 고전을 통해서 자신들의 작품을 창조했고, 그것들 또한 고전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도 고전이라는 게 가능할까? 앞에서 본 푸코나 마르크스 혹은 칸트, 헤겔이 했던 것처럼 하면 이 시대에 학술적인 고전을 남길 수 있을까? 내가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얼추 비슷하게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할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금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인문학적 고전은 포스트 모더니즘 후로는 종말인가 싶을 정도로 그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학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많이 줄었으며, 출판업계는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그런 작품을 찾아보거나 논문을 읽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재밌는 콘텐츠가 많아서 그런 것들을 보는 시간마저도 모자라는데. 


  이 시대에 고전이 불가능한 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대중의 무관심은 학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고,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하지만 고전의 틀에 갇혀있는 연구의 한계성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공부하면서 많은 논문을 읽었다. 학술서도 보고, 해설서도 보고 많은 텍스트를 읽으며 드는 생각은 "학자들이 학자들을 위한 연구를 하는 것이지, 사회나 대중을 위한 연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르게 말해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어느 학자 전공자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과거의 시점으로 과거의 학문을 연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한 연구도 필요하다. 메를로퐁티와 칸트를 비교하는 연구도 필요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중용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도 든다. 후대의 학자들은 지금 이 시대의 학자들을 인문학의 거장이자 고전의 주인으로 볼까? 과거의 학자들을 연구하고, 그들의 입장으로 현대적인 논문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입론 없이 남의 주장을 인용하기만 한다면 과연 고전으로써 학계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


  만약 나 오경수가 푸코를 통해서 학위를 받고 계속 푸코를 연구했더라면, 나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나는 그저 그들이 푸코를 연구할 때 보는 논문의 저자이며, 푸코를 연구한 푸코전공의 철학자일 것이다. 학위 논문을 써야 학위를 수여받는 학계에서 **전공이라는 말은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라면 그 꼬리표를 떼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이론을 주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드문 것 같다. 자기 전공의 철학자가 익숙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해설과 설명으로 학문적 수명을 연명하며,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우린 아직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도 많은 논문을 쓸 수 있으며, 아직도 연구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대학원 중퇴한 학사 주제에 감히 한마디 하자면, 우리 시대에 고전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이론을 세우기보다 선대 학자들의 고전을 인용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칸트는 어느 철학자의 목적이 되기보다 그 철학자의 사유와 이론 정립을 위한 하나의 참고 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 자신의 전공 학자는 마치 종교의 신과 같다. 학자들은 그 신에 대해서만 다루며, 그의 목소리로 다른 철학자를 비판한다. 스스로 학문을 하고 학자가 되어 고전을 남기기보다, 남의 것을 인용하고, 비판하는 한계에 갇혀서 그저 공부하는 것 같다. 


  과학의 비대한 영향으로 철학이 설 자리가 줄은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학으로 인식하며, 신은 죽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휴머니티와 인간이 인간임을 망각한 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리는 여전하며, 그들의 과제는 더욱이 커졌음은 분명하다. 학계를 위한 학자는 충직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를 위한 학자는 존경받을 것이다.


  이 글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학위도 없는 학사 주제에 학계의 분위기와 학자의 태도를 논하는 게 건방져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틀렸을 수 있음에도 나는 내 주장을 피력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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