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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Mar 24. 2024

주체와 자기의 차이

Difference between sujet and moi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나는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주체(sujet)와 자기(moi)의 차이에 대한 고찰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두 단어 모두 나(myself)를 뜻하는 이음동의어의 관계인줄 알았다. 그래서 푸코를 공부하며 혼동이 왔었다. 이 사람은 주체와 이성을 해체하면서 자기를 예술작품처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말이 논리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었다.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혹은 뜨거운 얼음처럼 모순된 개념 같았다. 대체 해체와 형성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나에겐 굉장히 어려운 딜레마였다. 그래서 학부시절 푸코에 대한 공부를 잠시 그만두고 니체와 하이데거를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허물고 그에 대한 대책은 주지 않으며,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 비판하는 푸코의 사유는 자극적이라 빠져들기 쉽고, 모두 맞는 말 같았다. 하지만 내 이성의 한편에서는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떻게 하자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푸코가 광기의 해방을 외친 것을 사회가 다분히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은 카오스 그 자체일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정신병원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 감옥에서 죄수와 간수의 관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 교사와 학생 등 세상에는 수많은 기울어진 권력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성의 불합리를 이유로 이 조화의 관계를 무너뜨린다면? 그야말로 정글과 같을 것이다. 아니, 야생에서는 힘으로 권력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비유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만약 그런 디스토피아가 실현된다면 그건 아마 야생의 초원보다 무질서하며, 소돔과 고모라의 난교보다 더 난잡할 것이다. 


  하지만 내 오해였다. 하긴, 순수 철학과도 아니고, 복수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하는 공학도가 1000페이지에 달하는 국가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바로 다 이해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계속 이 사람의 사유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의 다른 작품들과 그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연구 또한 탐독했다. “푸꼬는 자신의 작업을 내용과 방법론의 측면에서 1960년대의 ‘지식의 고고학’, 1970년대 중반까지의 ‘권력의 계보학’, 1970년대 중후반 이후 1984년까지의 ‘윤리의 계보학’이라는 세 시기로 대별한다(허경, 322).” 이 세시기를 순차대로 공부하고 2차 자료들을 찾아보며 그의 사유를 추적해 나갔다. 원전 작품의 번역본만 보다가 해제본과 여러 학자들의 논문을 찾아보며 공부하니까 내가 얼마나 푸코에 대해 이해를 못 하며, 오해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 사람은 정말 큰 그림을 그리며 평생을 연구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 명의 푸코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인식론적 단절은 경계선이 확실하다. 지식에서 권력으로 넘어가며, 말년에 그는 실존의 윤리에 해서 다뤘으니 말이다. "하지만 푸코의 관심사는 언제나 주체였다. 그가 가진 관심은 ‘주체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하는 것이다(강미라, 11)."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의 푸코의 문제설정은 다음과 같다. "지식을 가진 주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지식의 고고학, "권력관계에서 행사하기도 하고 그 앞에 복종하기도 하는 주체인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는가?"―권력의 계보학, "행위의 도덕적 주체로서 어떻게 구성되는가?"―윤리의 계보학. 사후에 푸코의 연구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푸코의 연구주제는 인간의 주체화와 그 방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주체라는 단어는 그의 마음에 드는 단어가 아니었다. 푸코에게 주체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예술작품이 아닌 태어나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칸트가 인간의 보편적이며, 선험적인 직관에 대해 논하듯이, 푸코에게 주체(sujet)란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함의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주체와 인간이라는 단어 사이의 이퀄기호(=)를 부등호로 바꾸는 일이란 어려웠다. 누군가와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은 근본적 귀속오류의 시작임과 동시에 비이성의 시작이기도 하다. 따라서 푸코는 주어지는 주체가 아닌 만들어지는 주체 혹은 자신을 칭할 새로운 단어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자기(moi)'이다. 


  그리고 푸코는 그 새로운 주체에 대한 윤리적 실천을 자기 배려(souci de soi), 자기의 테크놀로지(technologie de soi)로 일컫는다. “그리스어의 ‘테크네’는 무엇보다도 미적, 윤리적 실천의 수완을 가리킨다. 따라서 푸코가 말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란, 주체가 담론의 효과 혹은 지식-권력의 함수로 머무는 데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미적, 윤리적 주체로 세우고, 자기의 배려를 통해 제 삶을 예술적 완성으로 끌어올리는 존재미학의 수완이라 할 수 있다(진중권, 174).”


  푸코가 최종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근대를 끝내는 것이며, 근대를 끝내고자 하는 이유는 주체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푸코는 칸트로부터 비롯된 인간학적 잠을 끝내고 니체적 위버멘쉬를 통해 주체와 자기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했다. 

  푸코에게 주체는 죽어야 할 대상이며, 근대는 끝나야 할 시대였다. 그리고 그는 칸트의 인간학에서 벗어난 실존의 미학’(esthétique de l’existence)을 꿈꿨다. 그가 바라던 것은 주어지는 주체가 아니라 예술작품처럼 스스로 만드는 자기(moi)였으며, 그 새로운 존재방식의 지평이 될 근대 이후의 시대였다. 주체란 근대의 산물이자 근대의 잔해물이며, 푸코라는 이름의 포스트모더니스트에게 그것은 청산해야 할 과거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근대 이후의 존재로서 자기(moi)를 형성하고자 했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더 이상 개인들 혹은 인생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오로지 사물과만 관 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닐까? (디디에 에리봉, 578)"


Reference

강미라, 「니체와 푸코의 실존의 미학」, 『현대유럽철학연구』 제62집, 한국하이데거학회, 2021.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역, 그린비, 2012. 

진중권,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 위계없는 차이의 향연」,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허경, 「미셸 푸꼬 : 우리 자신의 역사적, 비판적 존재론」,『현대프랑스철학사』, 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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