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Mar 25. 2024

본질의 해석학적 차연

Hermeneutic différance of the essence

모리츠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작품 <Waterfall>(1961)

해석에 대하여

   인간이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석의 시발점일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는 칸트의 말처럼 인식 없는 해석은 공허하며, 해석이 없는 인식은 맹목적이다. 이 둘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1872)에서 예술적 두 충동―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공존과 조화를 말한 것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 양자는 쌍둥이와 같으며, 남자와 여자와도 같다. 


  해석이란 인식 이후의 과정이다. 우린 여름에 어떤 사람이 착용한 파란색 셔츠를 인식하고, 시원해 보인다는 해석을 내린다. 그리고 길 가다 본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며, 귀엽다는 해석을 내리며, 때론 관조를 통해서 미(美)적인 해석을 자의적으로 내리기도 한다. 해석은 객관적이기도 하며, 때론 주관적이다. 


  의학계는 혈당이나 혈압수치를 측정하고, 특정 수치 이상이거나 이하면 환자의 병명이나 상태를 해석하고, 환자의 질병을 규정하므로, 이러한 의학적 해석은 객관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특정 인간이나 예술에 대한 해석도 객관적으로 가능할까? 우리는 회화나 조각을 감상하거나, 한 인간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본인이 인식한 것을 바탕으로 그 작품이나 한 인간을 해석하며, 자의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해석을 통해서 그 작품이나 인간에 대한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이며, 동시에 의식적인 것들이다. 일할 때의 모습, 밥을 먹을 때의 모습, 술 마실 때의 모습은 각기 다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모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지극히 피상적인 부분만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대해 인식할 때, 그의 모습은 유의식적으로 편집된 모습일 것이다. 직장이라는 지평에서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서 그 인식틀에 맞는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자신을 검열하고, 편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부분은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한 온전한 해석을 내릴 수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등장한 후, 데카르트의 자명한 명제―cogito ergo sum―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극히 의식적이며, 이성적이라 여겨지던 주체의 출발점이 더 이상 명확한 토대가 되어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모든 순간 함께한다 하더라도 우린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그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본인마저도 모르는 자신의 원자아를 어떻게 타자가 이해하고, 온전한 규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린 그에 대한 온전한 해석을 내릴 수 없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해석과 판단은 그저 피상적 인식과 이론적 배경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주관적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작가의 제작 당시 상황과 심리 그리고 그의 무의식 등 수많은 요소들이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이 작품에 대한 온전한 해석을 안개처럼 가로막는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현존재의 실존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100% 온전한 해석을 내리기는 어려우며, 우리가 인식한 것을 토대로 부분적인 해석을 한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연(Différance)

  차연(差延différance)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개념으로,  1967년 『소리와 현상』에서 현상학 비판을 위해 사용한 용어. ‘차이()’가 사물의 차이를 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공간적인 개념인 것에 대해 ‘차연’은 그 차이가 산출된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적이고 시간적인 개념이다. 나는 차연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하나의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연적인 것이라 말한다. 즉 사과는 무조건 빨갛고 동그란 과일의 기표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운 건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며, 이는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 우리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오경수인 이유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지어줘서 그런 것이다. 작명은 우연적인 것이며, 사회적 약속이다. 그리고 소쉬르는 결국 기표와 기의의 우 연성은 차이에 의해서 드러낸다고 말한다. 사과, 배, 수박이  있을 때, 사과가 사과인 이유는 배와 수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집에서 아들인 이유는 우리 가족 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 데리다는 이러한 소쉬르의 입장에 한발 더 나아간다. 데리다는 이러한 차이가 끊임없이 무한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오경수인 이유는 오경수가 아닌 것만이 아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경석이 아니고, 오지수가 아니고, 이경수가 아니고, 김경수가 아니고, ..가 아니고, ..가 아니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차이가 발생한다. 이때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지연된 다. 그래서 데리다는 라캉이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을 제창하 듯이 기표와 기의의 온전한 결합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 서 데리다는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차연은 차이(Difference)의 어미 ‘-ence’를 ‘-ance’로 바꾸어서 만든 것으로, 그 의 해체적 반인식론(Anti-epistemology)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련어들을 지칭하기 위한 독특한 조어이다. 이 관련어에는 다르다(Differ)라는 의미와 연기하다 · 지연시키다(Defer)라는 의미를 모두 가지 고 있는 프랑스어 differer(디페레)가 포함되어 있다. 즉  Différance(디페랑스)는 동음어인 differer(디페레)가 결합되어 만들어졌음을 알리기 위해 어미 ‘-ence’를 ‘-ance’로 바꾼 것이다. … 결국 정의란 무한한 차이와 완성의 지연으로 인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정의는 실존의 본질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사랑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이 될 수 있다(오경수, 184-5)."  


이데아 혹은 물자체

  플라톤은 세상을 둘로 나눈다. 가시계―감각으로 알 수 있는―이며, 진짜 세상의 복사본에 불과한 이 세계(현실세계)와 가지계―이성으로 알 수 있는―이며, 이 세상의 원본이며,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진짜 세계로. 플라톤의 이론에 따르면 내 앞에 있는 커피는 가짜다. 정확히는 이 세상의 모든 커피는 가짜다. 오로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커피―커피의 이데아―만이 진짜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맛볼 수 없으며, 눈으로도 볼 수 없다.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가능한 이 세계에 없기 때문에. 


   약 2000년 후에 태어난 위대한 철학자 칸트도 인식론의 영역에서 세상을 둘로 나누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 즉,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감관과 오성이 만들어낸 현상과 그 자체로 있는 물자체로.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보는 것은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선험적 구조에 의해서 물자체를 인간의 방식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언어가 아닌 바벨의 언어로 이름을 부르고, 그것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우리가 이 세계―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 온전한 해석과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앞절에서 이 세상에서 온전한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처럼.


결론

  따라서 해석은 닿을 수 없는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차연의 향연이다. 독심술로 상대의 술수를 꿰뚫지 못하듯이, 이 차연의 향연에서는 하나의 전략이 아닌 끊임없는 경우의 수들 만이 존재할 뿐이다. 푸코의 책들, 리히터의 추상화 작품들, 자코메티의 조각들, 스티비 원더의 음악들 그리고 나의 글들은 각각 그 개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작품이란 결국 피상적인 그의 껍질이자, 허물이며, 그것은 편집된 것이지 온전한 본질이 아니다. 웃음을 파는 광대에게도 슬픔이 있으며, 이별을 노래하는 발라더에게도 만남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가능한 한계 안에서만 세상을 나름대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결코 본질이 될 수도 없으며, 확정적 해석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해석하고자 하는 그 개체의 본질은 물자체이며 이데아일 것이다. 해석은 짝사랑과 같다.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계속 손을 뻗어내지만, 우리는 그것을 잡을 수 없다. 잡을 수 있을 듯하면서 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본질이 아닐까.


Reference

오경수, 「헤테로토피아와 차연 Hètèro-topie et differance」,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


네이버 블로그


주인장 신작,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작가의 이전글 주체와 자기의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