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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17. 2024

죽음은 현존재의 합목적성이 아니다.

Tod und Existenz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 <죽음과 삶>(1915)

  이전 글에서 현존재를 칸트의 제3비판서―『판단력 비판』(1790)―을 통해서 그의 미학에 대해서 논하고, 그 이론 체계로 현존재를 투시했다. 칸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서 아름다움이 발생한다고 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 본질에서 벗어나고, 그것에서 무관심한 상태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현존재의 합목적성과 존재미학에 대해서 논했는데, 그 과정에서 죽음에 사유를 빼놓을 수 없었다. 인생은 탄생이라는 시발점에서 소멸이라는 종점으로 기투하는 과정이다. 시점에서 종점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력으로 갈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종점을 앞당기는 것과 종점을 최대한 미루는 것 또한 자신의 자유이자 선택이다. 하지만 광활한 자유 속에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두 개 있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이다. 이 둘은 내 자의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현존재와 피투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 태어나서 사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다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우선 태어나기 전에 태어남을 원했다는 것부터가 논리적으로 어긋난다. 태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의미를 함축하는데, 이게 가능한가? 이데아론을 펼쳤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아마 가능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론 체계에서 인간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이 세계로 넘어왔는데, 그 과정에서 레테의 강을 지나면서 모든 지식을 망각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데아가 존재하는지, 레테의 강이 우리를 망각의 존재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며, 증명할 수도 없다. 고대 철학이라는 게 원래 그런 묘미가 아니겠는가. 알 수 없기에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 아무튼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어나기 전에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한지도 인식이 불가능하며,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있다는 사실과 그리 있음에, 실재, 눈앞에 있음, 존립, 타당함, 있음에 “주어져 있음”에 놓여 있다”라고 말한다(ZS, 21). 존재란 능동적으로 양태를 드러내는 본질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엇이다. 그렇다면 존재라는 개념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그것은  정의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17). 인생이라는 반직선의 시작점은 주어지는 것이며, 현존재들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존재의 탄생과 동시에 나의 시계의 바늘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또한 갑작스레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은 또다시 갑작스레 멈춘다.


현존재와 죽음

  현존재에게 죽음이란 큰 의미를 지닌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형언할 수 없는 현상 혹은 상태는 현존재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 죽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 결과뿐만 아니라 죽음의 과정 또한 고통과 불안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죽음은 왜 발생하는가? 만약 이런 공포스러운 요소가 없다면 인간은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우선, 죽음이 발생하는 원인은 일단 생물학적 측면의 한계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나이를 먹고, 늙고 노쇠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사망한다. 즉, 현존재의 소멸은 유물론적인 한계이다. 의학과 생명공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죽음은 미지의 대상이자, 인간의 한계점을 시사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다른 의미를 함의하지만『말과 사물』(1966)의 마지막처럼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MC, 526). 인간의 유한성. 그것은 칸트로부터 시작된 근대의 출발점이었다.

  생물학적 한계를 지닌 인간의 말로는 죽음인데, 이는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동시에 수용해야 할 대상이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이 죽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필연적 사건이다. 그래서 우린 죽음을 주지하고,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어느 방향으로 가던지 피할 수 없으며, 어떤 속력으로 회피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린 죽음을 두려워하며 이 반직선을 선분으로 마무리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오히려 우린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성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과연 죽음 앞에서도 그 대상 이 중요한가? 만약 죽음 앞에서 그 존재에게 내 의식이 지향성(Intentionality)을 잃는다면 아마 그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 다. 반대로 죽음 앞에서도 내 의식의 지향성이 그 대상을 향한 다면 아마 그건 나의 본질과 같이 중요한 것일 거다. 즉, 우리는 불안을 통해서 진짜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지금 당장 위험한 상황에 닥친다면  아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외한 지갑이나 스마트폰을 챙기기보다 우리 자신의 육체를 탈출시키는데 급급할 것이다. 그렇다 면 우리는 이 불안한 상황에서 결국 우리 자신 외의 것들은 부 수적인 것이며,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RD, 195).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세상에 던져지고, 언제 거두어질지 모르는 이 실존. 이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나침반이자, 기투(entwurf)의 원천이 되지 않을까.


유한성 속 무한성

  유한한 인간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유한 속에 무한이 있다는 말은 모순이지만, 나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다. 인간은 탄생과 소멸이라는 두 점 사이를 잇는 선분이자 직선이며, 동시에 곡선이다. 이 선은 '기획투사'라는 점으로 구성된다. 점과 점 사이의 선분의 길이는 유한하다. 하지만 그 두 점이 꼭 최단거리인 선분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위아래로 요동 칠  수도 있고, 꼬일 수도 있다. 여하튼 점과 점을 관통하는 이 선은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루트를 그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예술이다. 철학자 푸코는 말년에 “자기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한다”는 이념에서 출발해 ‘실존의 미학(esthétique de l’existence)’이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을 제출하기도 했다. ‘실존의 미학’이 의미하는 것은 우선 자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삶의 방식이며, 자기에 대해 작동을 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변형으로 향해가는 삶이다. 푸코에게서 미학이라는 테마는 그저 예술의 문제로만 시종일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까지도 포함되는, 넓게는 ‘사회적인 것’의 관건이 되고 있다. 푸코에게 ‘미학적 사유’는 항상 ‘윤리적, 정치적 사유’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형태로 존재한다(FA, 9-14).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89~1967) - <인간의 조건>(1935)

결론

  인간의 끝이 죽음이라고 해서 그 존재의 합목적성이 죽음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한계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성은 무엇인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우리를 창조한 신이 있다면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죽음은 실존을 예술로 만들게끔 한다. 유한한 캔버스를 이젤 위에 올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터치를 시작하듯이, 실존을 기획투사하는 인간의 실존은 이미 예술 작품이다. 그렇다면 실존이라는 작품의 완성은 죽음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이 작품에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느끼는 사람은 나일수도 있고, 내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관조의 주체 자체가 그렇게 문제가 될까 싶다. 중요한 건 나(moi)라는 현존재(Dasein)의 본질이 어떤 양태로 나타나고 있느냐다. 이 작품은 이미 존재를 드러내고, 그의 세계를 열었다. 그렇다면 작품의 완성여부와 관계없이 그는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진실은 존재자 그 자체의 막힘없음이다. 진실은 존재의 진실이다. 아름다움은 이런 [진실과 분리되어] 진실 옆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스스로를 작품 속에 작동하게 놓을 때 현상한다. 이 현상함이 —진실이 작품 속에 이렇게 좆재하는 것 그리고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 사건[존재 사건]으로서 일어나는 진실에 속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단지 그것이 마음에 드는 정도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저 마음에 드는 대상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것은 형태에 기초한다. 그런데 그렇게 기초하는 유일한 이유는 포르마[형태]가 일찍이 존재자의 존재자적 본성과 동일시된 존재를 바탕으로 트였기 때문이다(UK, 129).


Reference

다케다 히로나리, 『푸코의 미학』, 김상운 역, 현실문화, 2018. (FA)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1998. (ZS)

_____________, 『예술 작품의 샘』, 한충수 역, 이학사, 2022. (UK)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역, 민음사, 2021. (MC)

오경수,「현존재와 그의 염려」,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퍼플, 2024. (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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