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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28. 2024

예술과 인정욕구

The purpose of Art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 <풍선 개>(1994~2000)

  인간에게 예술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일단, 예술은 일종의 소통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통의 발신자인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매개로 수신자에게 정신적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며, 수신자인 관람자는 그 정보를 토대로 작품을 감상하고, 나름의 평가를 내린다. 그래서 예술의 의미는 발신자인 예술가와 수신자인 관람자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우린 예술을 접할 때 필연적으로 이 두 위치 중 한 곳에 있다. 그렇다면 발신자와 수신자에게 예술이라는 행위는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앞에서 예술을 일종의 소통 과정으로 비유했는데, 이 소통과정은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전달하는 숭고하면서도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즉, 굉장히 대자적인 혹은 정신적인 활동이다. 그러니까 정보 전달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진리는 현상적 차이를 넘어 동일성을 추구하는 데 반해 예술은 차이와 다름을 추구한다(NA, 73). 기호나 도상은 담긴 뜻을 전달하는 데에 그친다. 신호등의 빨간불은 그저 운전자와 보행자에게 정지를 함의할 뿐, 다른 정신적인 충격을 보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로스코의 색면 회화를 보고 울음을 터뜨리고, 소리의 진동에 불과한 음악을 듣고 기분을 전환한다. 그리고 때론 한 인간의 개인적 운동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무용을 보고 정신적 울림을 받기도 한다. 세상에 다양한 예술이 있는 만큼, 그에 따른 다양한 감동이 있다. 하나의 같은 작품을 감상하더라도 개인이 느끼는 감상이 다 다르기에 어쩌면 당연한 논리다.

  예술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건 고대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은 미학을 명백한 탐구의 대상으로 여긴 최초의 철학자였다(AP, 31). 예술에 대한 그 정의는 같은 시대라도, 사람에 따라 달랐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정의는 유기적으로 변화해 왔다. 예술이 변화하는데, 예술의 정의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얼마나 웃긴 일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진리가 아는 것의 재확인이라고 했는데, 그가 만약 자신의 미학이론으로 뉴먼의 회화를 논한다면, 말문이 막힐 것이다. 우린 그 캔버스 안에서 우리가 아는 것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미학이론들이 새로운 미학이론에 밀려서 추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아리스텔레스의 『시학』은 여전히 의미 있으며, 그 안에서 인간의 감성학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과거의 미학이론을 받침 삼아 후대의 미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도약한다. 그래서 어떤 학문이던 고전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며, 그 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여하튼 나는 이 글에서 예술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서 새로운 미학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이데거와 같은 대부분의 철학자 혹은 미학자들이 예술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기술했던 것과 반대로 나는 예술가와 관람자의 두 관점에 따라 각각 다른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예술가의 관점

  예술가는 왜 예술활동을 할까? 번뜩이는 영감이 떠오르거나, 밀린 작업실 월세를 벌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결과물을 쥐어짜는 등 그 이유는 각 예술가마다 그리고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마다 다 다를 것이다. 주관적인 견해인데, 예술가는 머릿속 생각을 통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근원에서 그저 퍼올린 것일 뿐이라는 등 예술가를 일종의 수동적인 영매 혹은 통로 같은 존재로 보는 미학이론들은 와닿지 않더라. 우리는 미(美)라는 관념을 온전히 정의할 수 없기에, 그것은 현상계 너머의 물자체와 같은 인간 인식 너머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인간 정신 너머의 근원적 일자나 절대정신이라는 존재가 요청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견해를 가지는 학자들의 입장도 이해는 되나, 나의 미학이론을 그러한 견해들을 토대로 입론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예술의 근원은 세속적이며, 동시에 정신분석학 혹은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술 자체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 메타(meta)예술담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예술의 형이상학적 기원을 논하기에 내 배움이 짧으며, 동시에 이데아와 같은 저세상에 기인하는 이론은 신화와도 같기 때문에 나는 속세의 안에서―예술가를 중심으로―예술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술을 하는 정신적인 이유? 형이상학적인 이유? 그런 이유를 하나의 원인으로 확립하는 것은 마치 미(美)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과 같다. 주관적 보편성과 같이 확언할 수 없는 정의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제 왜 예술가는 예술을 하며 그 활동이 그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세속적인 이유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겠다. 나는 그 이유를 '타자의 시선(regard de l'autre.)'으로 본다. 시선 혹은 인식이라는 것은 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행위이다. 무언가를 인식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예술을 감상하겠는가. 앞의 문장은 전적으로 예술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관통하는 굵은 명제인데, 나는 이 단락에서 예술가의 관점이라는 한계 속에서 예술을 정의할 것이기 때문에 그 단어들의 의미와는 다르다.


시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시선이란 인식론에서 말하는 감각적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시선이다. 저 사람은 키가 크다. 얼굴이 잘생겼다. 학벌이 좋다더라. 성격이 까칠하다더라. 이런 사회적 시선. 타인이 나의 일부 모습을 보고 '나'라는 주체를 사회적으로 판단한 그 시선.

  시선은 단순히 두 눈동자의 움직임이 아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 시선은 '힘'으로 규정된다. 그것도 그 끝에 닿는 모든 것을 객체화하는 힘으로 규정된다. 정확히 이런 이유로 시선의 주체인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항상 '갈등'과 '투쟁'의 상태에 있게 된다(JP, 124).

  시선을 통해서 나를 객체화하는 타자는 나에 대해 분석과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의 해석이 나에 대한 진리가 된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나에 대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 이처럼 나는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라고 주장한다(JP, 125-6).” 그 시선의 해석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본질과 다르더라도, 수많은 타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이 된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 <Dhôtel nuancé d'abricot>(1947)

  애들 장난 같은 앵포르멜도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들 앞에선 가치 없는 물감덩어리에 불과하지만, 학자들이 철학적 담론을 통해 찬사를 보내고, 소더비와 같은 경매회사에서 고가에 거래된다면 , 그리고 그 사실이 공표된다면 다른 아우라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의 시선과 해석. 그것이 권력을 만들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시선이라는 시놉티콘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것을 고려하며 산다. 좋게 말해서 눈치 있게 살고, 나쁘게 말해서 눈치 보며 산다. 그래서 좋은 옷을 입고, 고가의 명품을 든다. 여름에 노출하기 위해서 봄이 시작되기 전부터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들고, 사진으로 남기고, 그것을 타자들에게 표출한다.

  예술이라는 행위도 이와 같고 본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타자들에게 인정욕구를 표출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에게 도취하는 것이다. 내가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미감이 뛰어나며, 철학적인 사색을 한다는 것의 징표이며, 작품을 출품하는 것은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며, 그 행위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모습에 취한다. 결국 멋과 허세를 위해서 예술을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고립된 존재라도 예술을 했을까? 예술이라는 단어조차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며, 남에게 보이지 않는 그 존재에게 멋과 미(美)는 인식 밖의 단어일 것이다. 현존재의 사회성과 세계라는 지평이 시선투쟁을 만들고, 그 시선에 대응하고자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서 인간은 예술을 하고, 스스로 도취하는 것이다.


관람자의 관점

  예술가의 경우, 자신의 인정욕구를 표출하고, 예술이라는 행위를 하는 자신에게 도취하기 때문에 예술을 행한다. 그렇다면 관람자는 어떨까? 관람자의 경우도 비슷하다.

시놉티콘 속 관람자

  내가 이런 전시회를 보러 다닐 정도로 예술에 조예가 있으며, 이 정도로 교양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요즘 관람자들에겐 하나의 중요한 문화가 있다. 그건 바로 인증샷이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우린 점심으로 뭘 먹고, 식후 커피는 어디서 무엇을 마셨는지까지 공유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먹는 거야 맨날 하는 거라 당연하지만, 미술관, 극장, 전시회는 매일가지 않는다. 바쁘디 바쁜 현대인에게 쉴 시간도 모자란데, 문화생활은 사치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문화생활은 더욱 귀하며, 그들은 이것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문화생활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자신이 무엇을 관람했는지 일상을 공유한다. 그리고 자신을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예술을 즐기는 문화인 혹은 교양 있는 현대인으로 포장한다.


주체의 재확인

  하지만 관람자에게 이유가 꼭 허세와 겉멋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쁘고 바쁜 이 현대사회에서 굳이 문화생활을 즐기는 이유는 단지 허세와 간지(感じ)만이 아니다. 관람자에게 예술이란 인식적 환기(refresh)며 동시에 개인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개인을 찾고, 확인하는 계기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기투(entwurf)다. 고된 일주일을 마치고, 불금에 미술관에 자신을 기투함으로써 자신의 미적 취향을 만나고, 그러한 재회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주체임을 재인식한다.


인간학적 관점

  결국 인간에게 예술이란 자신의 여유로움과 교양을 드러내는 허세의 매개임과 동시에, 자신이 대자존재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성이 있는 주체임을 확인하는 사건이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쓴다거나 그에게 잘 보이려 발악을 떠는 것 또한 현존재의 인간적인 면모로 보인다. 예술사회학. 그것이 내가 시선이 끊이지 않는 사회 속에서 예술을 보는 방법이다. 그 내용은 미학적이거나, 정신분석학적일 수 있다. 작품의 내용은 원자아가 발현된 장(field) 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행위를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본다면 그건 원자아(id)가 아닌 초자아(super ego)의 발현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 이래로 근대적 주체의 특권적 지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예술이라고 과연 프로이트를 피할 수 있겠는가(NF, 22). 그런 면에서 예술이란 무의식이 발현된 활동이기도 하다. 고흐의 구두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여성의 남근을 뜻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어쩌면 구조적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도 마찬가지고.

  동시에 예술은 인간의 실존을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젤 위의 캔버스에 붓칠을 함으로써 혹은 폴록과 같이 드리핑 기법을 통해서 기투를 할 수 있으며, 그림에 대한 과한 혹평 혹은 찬사로 주변의 시선을 받음으로써 살아있음 그리고 정신의 존재를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예술이란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인간의 실존뿐만 아니라 이성, 감성, 기투, 사회학, 욕망, 인정욕구 등 인간의 원자아부터 초자아까지 모든 부분을 담고 있다.

  모든 존재자는 능동적으로 해석에 참여하고 또한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의 관점을 지닌다(NF, 169). 그래서 나 또한 이 글에서 예술에 대한 나만의 해석의 관점을 기술해 보았다. 그런 면에서 예술에 대한 나의 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Reference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비, 2021. (NF)

시릴 모라나 · 에릭 우댕, 『예술철학』, 한의정 역, 미술문화, 2019. (AP)

정낙림, 『니체와 현대예술』, 역락, 2012. (NA)

변광배, 「장뽈 사르트르 : 인간 존재 이해를 위한 대장정」, 『현대프랑스철학사』, 창비, 2015.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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