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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Oct 21. 202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 <생각하는 사람>(1880)

인간이기에 생각하는 것일까 아님 생각하기에 인간인 것일까. 전자가 맞다면 생각이라는 것과 별개로 우리는 모두 인간임이 분명하다. 아니, 전자는 생물학적인 인간의 시작점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후자의 경우는 인간은 출발점이 아니라 도달점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생각이라는 사유 활동을 통해서 자신이 인간임이 마땅함을 증명한다. 따라서 전자에서 생각이란 인간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도약점으로 생각을 배치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는 종(species)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생각을 함으로써 그가 사유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사유하기에 그가 인간인지에 대한 논쟁은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으로 정의되더라도 불가피한 건강상의 이유로 식물인간일 수도 있고, 혹은 선천적으로 남들과 달라서 사유라는 것이 어려운 인간도 있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 논쟁에서 어린 아이나 태아는 그렇다면 인간인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기에 생각하는가 아니면 생각하기에 인간인가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보통 말하는 생각의 의미는 아마 사물이나 상황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혹은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유물론적인 측면이다. 그것은 신체의 작용이며, 육체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다른 의미의 '생각'을 인간의 존재와 엮어보고 싶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의 의미는 자신의 존재와 실존에 대해 염려하고, 고민하는 행위를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에서 뗄 수 없는 것으로 염려를 말한다. 불확실한 미래와 언제 어떻게 어떤 일에 휘말릴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위험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그것에 대처를 할까? 일단은 인간이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왜 불안을 느끼겠는가. 불안을 느껴도 전능한 능력으로 다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한 결핍된 존재이기에 불안을 느끼고, 항상 미래에 대비한다. 여기서 인간은 내가 앞에서 말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저 유물론적인 혹은 사회적인 이유로 흘러가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기투한다.


현재 모든 인간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운 것 같다. 우린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과연 그럴까? 혹은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생각이 온전히 나의 생각일까? 데카르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회의하다가 그 모든 것을 회의하는 나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며 자신이 생각하므로 존재함을 증명해 냈다. 프로이트와 라깡과 같은 학자 이전에 그 명제는 절대적이었다. 생각함과 존재함이라는 것은 깰 수 없는 토대론적인 요소였다. 그런데 무의식의 발견으로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의식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이 폭로되었고, 푸코,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는 주체를 공격하고, 해체했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라깡의 이 명제는 어쩌면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이론을 동시에 관통하는 경구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나에게 노출되는 수많은 자극적인 컨텐츠가 내 무의식을 떠도는 시대에 라깡의 말이 어쩌면 이 시대의 에피스테메일지도 모른다. 집에 가서 유튜브를 봐야지 하는 생각은 집단 속에서 대화에 끼기 위한 초자아적인 이유와 재미와 나태라는 자극적인 요소를 추구하는 원자아적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은 사유가 아니라 흘러가는 생각에 불과하다. 그저 입력과 출력값이 같은 전선과도 같다. 그것을 봐도 남는 것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내 시간과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렸을 뿐이다. 


무언가를 해도 남는 것이 없다면 나는 철저히 착취당한 것이다. 노동을 하고 돈을 받지 않으면 당연히 착취당했다고 생각하고 노동청에 신고하지만, 우린 한 시간 넘게 방구석에 갇혀서 눈과 뇌를 썩히는 고문을 당했음에도 그 고문을 더욱더 간청하는 마조히스트가 되었다. 오히려 더 자극적인 고문을 호소하며, 입력값 외에도 시간과 기회라는 추가적인 것을 출력값으로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을 그저 무(無)의 공간으로 두고 다른 고문실로 이용할 뿐, 진정 나를 위하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는 공간으로 쓰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만 할 뿐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생각은 내가 없는 곳에서 타자가 만들고 있다. 우리는 그 생각을 건네받고, 다시 남에게 돌려주며 나의 본질적인 것들도 함께 내어준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을 하기에 자극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 누가 요즘에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며, 아름다운 시를 읽고 감탄을 하겠나. 그저 넷플릭스와 유튜브 홈 화면에서 뭘 볼지 고민하는 것과 배달음식으로 무엇을 시킬지가 현대인이 하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우린 생각을 해야 한다. 정확히는 나에 대한 생각. 나를 위한 생각. 남는 것이 있는 생각. 구조 속의 변수아 아닌 자신을 잃지 않는 상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우린 생각을 해야 한다. 미디어와 자극이라는 파도 위에서 우린 부표처럼 표류하고 있다. 이 조난에서 구조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그 누구도 구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조난자이기 때문에 서로를 구해줄 수 없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사유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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