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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Oct 14. 2024

도덕과 윤리

Difference between moral and ethics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

도덕과 윤리는 초성도 다르고, 발음도 다르지만 뭔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마치 자기와 자아, 과학과 기술 등 두 단어가 가지는 가족유사성과 비슷하게, 도덕과 윤리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우린 뭔가 선행과 관련되어 있는 두 단어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덕은 의무교육을 받은 한국인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다. 도덕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배우는 과목이면서, 동시에 학생들에게 제일 쉬운 과목일 것이다. 그저 상식적이고, 당연한 착한 일을 고르면 그것이 답이기 때문에, 도덕은 영어나 수학처럼 미움받는(?) 과목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사회 탐구 과목을 고를 땐 도덕이 없다. 그곳엔 도덕 대신에 윤리라는 과목이 등장한다. 필자는 고등학생 때 이과라서 지구과학과 물리를 선택했는데, 문과생이었던 친구들은 윤리와 사상을 많이들 고르더라. 그리고 다른 과목은 다 포기해도 그 과목은 포기하지 않더라. 무튼 의무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도덕이라는 시작점에서 윤리라는 종착점으로 선(善)에 대한 대략적인 학문적 이해가 완성된다. 물론 모두가 그것을 체화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경찰과 감옥은 왜 존재하겠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한국인에게는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 굉장히 익숙한 단어이지만 막상 그 차이를 말하라고 시킨다면 제대로 답변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건 아마 이해도 보다 성적이라는 숫자 형태로 된 결과물에 집착한 나머지 학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과 입시는 어떤 학문인지 이해하고 고민하는 중간고사 70점 받는 학생보다 그런 건 무시하고 100점에 가까운 고득점을 취득하는 학생을 보다 더 학생의 이데아에 가까운 바람직한 학생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긴 뭐 어떻게 모든 지원자가 그 학문에 어떻게 얼마나 관심이 있고, 이해했는지를 다 일일이 인터뷰해보겠는가. 그러므로 점수라는 가시성 높고, 깔끔한 수단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게,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도덕과 윤리를 구분하고, 각각의 단어를 나름대로 재정의해보려고 한다. 내가 푸코와 니체를 통해서 사유체계를 형성했으므로, 아마 이 글에서 그들의 해체주의적 사고가 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도덕의 계보학

도덕과 윤리. 뭔진 모르겠지만 이 단어들을 접하면 뭔가 착하게 하는 행실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라. 윤리적으로 이게 맞나. 등 우린 이 두 단어를 정의(正義)에 대해 고민하고, 무엇이 맞는지에 대해 고찰할 때 많이 사용한다. 도덕적인 사람이라 함은 규정을 잘 지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일 거다. 규칙이 있으면 그 규칙을 지키고, 이타적이며, 양보할 줄 아는 그런 착한 사람. 그런데 그 착하다는 것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보통 그런 판단은 선생님이나 교도관 등 다수를 관리하는 통제권을 쥔 개인 혹은 소수가 한다. 담임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말썽을 부리지 않고, 온순하게 자기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일 것이고, 교도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규율을 잘 지키며, 명령에 복종하는 재소자가 착한 재소자일 것이고, 그런 재소자를 모범수로 선정하여, 형량보다 일찍 사회로 복귀시킬 것 같다. 결국 착하다는 것은 명령을 잘 따르고, 규범을 잘 지키며, 통제가 잘 된다는 상태를 함축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착한 사람이란 결국 윗사람이 판단하는 것이며, 아랫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도덕과 무슨 관계인가? 도덕은 우리에게 명령의 형태로 나타난다. 무엇을 하지 말아라. 무엇을 해라. 칸트의 정언명령이 도덕의 대표적인 예시인데, 칸트는 조건 없는 명령문 만이 올바른 도덕이며, 추구해야 할 선이라 주창한다.

도덕은 명령문이며, 특수기호로 치면 느낌표[!]와 같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 그것은 명령조로 말해지며, 의심할 여지가 없이 촘촘하다. 아니,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아무도 의심을 가지지 않고 수용한다. 

도덕이 그렇게 수용되는 까닭은 누구나 납득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이러한 도덕은 굳이 의문을 가질 필요 없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면 내가 몇 배로 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재산권이나 생명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도덕을 고민이나 의심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사실 말고도 우리는 더 많은 도덕법칙들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것은 한 가정 혹은 한 학교 안에서와 같은 한 집단 내에서만 유지되는 도덕일 수 있다. 당연한 것이 아님에도 그 소속의 개인은 그것을 아무 고민이나 망설임 없이 행하며, 그 집단의 상위 권력자는 그 도덕이 행해짐을 보며 자신의 힘과 위신을 재확인한다.

니체가 말하듯이 우리가 지키고 있는 도덕은 어쩌면 노예의 도덕일지도 모른다. 그저 착한 이미지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혹은 금전적인 이유로 어쩌면 우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삶의 헤게모니를 내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사장이 아닌 이상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내어줘야만 급여를 받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인데. 그렇다고 모두가 사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한국인은 고조선의 8조법 이래로 계속 도덕을 지키고, 숭상하며 살아가고 있다. 권력은 마치 피라미드와 같아서 소수의 도덕의 감독관이 대다수의 관리대상을 감독한다.


주체의 윤리학

당신이 상위 권력자가 아니라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지켜야 하는 것은 지키되 그 밖의 영역은 물음표를 던져서 자신만의 것으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도덕이 명령문의 느낌표[!]라면 윤리는 의문문의 물음표[?]와 같다. 윤리는 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일까? 어떻게 해야 내가 더 만족할까? 반대로 도덕은 나에게 고민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네비게이션과도 같이 나를 정해진 루트로 인도한다. 그리고 다른 길이 보여도 도덕은 허용된 범위 내에서만 다른 경로를 허용한다. 도덕은 하나의 이데아를 추구한다. 자본주의의 도덕이란 결국 손실은 최소화하는 것과 동시에 이익은 최대로 극대화하는 것을 말하고, 권력에게 도덕이란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도덕은 추구하는 바가 확실하다. 동시에 도덕은 공학적이라 그 이데아로 향하는 최적의 루트를 고민하는 과정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 추구하는 도덕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초자아적인 목표가 아닐까? 라캉이 말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앞의 명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와는 반대의 성격을 띤다. 라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함으로 존재한다는 이성주의를 반대한다기보다는 나의 주체성과 사유는 나의 자아가 아닌 사회나 집단과 같은 구조적인 요소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계속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결국 그 욕구는 나의 본연한 것이 아닌 사회적 혹은 구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욕구가 아닌 타자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에 윤리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나는 무엇을 취미로 가져야 하는가? 어떤 결혼생활을 해야 하는가? 물론 이 윤리라는 것은 8조법 같은 기초적인 도덕을 지키며 추구된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 도덕적인 문장은 생략되거나 괄호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한 기초를 기반으로 두고 윤리는 창의적으로 뻗어나간다. 도덕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는 공학적 방법이라면, 윤리는 예술과 같다. 그것에 답은 없다. 그것은 물음표로 시작해서 느낌표로 끝날 수도 있고, 물음표의 끊임없는 향연일 수도 있다. 


결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도덕과 동시에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윤리이다. 우린 너무 똑같은 이데아만 추구한다. 경쟁사회이기에 그 이데아에 도달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어려워진다. 마치 경마장의 말처럼 우린 목표지점 밖에는 관심이 없어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혹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살아 간다. 과연 남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운 좋게 그것을 달성했다고 해서 당연하게 그 결과에 만족할까? 

무언가를 추구하고, 노력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우린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모르고 추구하며,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무얼 잘하는지 모르는 채로 살아간다. 그래서 현대사회가 불행한가 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회와 타인에게 만족을 느끼고 행복을 찾겠는가. 세상에 나 말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린 자신을 바꾸지 않고서 자꾸 세상이 바뀌길 원한다. 제일 바꾸기 쉽고, 가스라이팅하기 쉬운 자신을 바꾸는 것과 누군지도 모르는 80억 명의 타인들을 바꾸는 것 중에 어떤 것이 과연 더 쉽게 행복이라는 것에 도달할까?

그래서 우린 보편적인 도덕과 동시에 개인적인 윤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 윤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알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푸코는 주체란 만들어짐을 주장함과 동시에 주체를 해체했다. 그리고 만들어지는 주체가 아닌 자신을 스스로 예술작품 만들듯이 만드는 자기(moi)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주체의 미학을 주창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2024년이야말로 그의 철학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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