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ein und Kunst
존재하는 자에게 예술이란 각자마다 범위가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겐 구상화까지만 미술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노이즈 메탈도 듣기 좋은 음악일 것이다. 니체에겐 사는 것 자체가 예술이고, 하이데거에겐 존재 자체가 드러남이 예술의 목적이다. 누구에게나 각자 향유하는 예술이 있을 것이며, 남들이 자각하지 못해도 그것에서 큰 카타르시스나 eudaimonia를 느낄 수도 있다. 미와 예술이라는 것은 어쩌면 보편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것이다. 누군가에겐 예술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의 쾌락이 그저 지나가는 흔한 유희거리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근본이 되는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신봉하고, 추구하지만 각자가 느끼는 감각과 그 역치는 모두가 다르기에 어쩌면 예술의 아름다움과 숭고는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와도 같을 지도 모른다. 각자가 확실하게 믿지만 남에게 증명할 수도, 제대로 형언하여 증언할 수 없는 감정. 그것이 각자가 느끼는 예술에 의한 희열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적인 감정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자들이나 대중들은 자유롭게 혹은 학술적으로 그들의 감상평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파롤(parole)이나 에크리튀르(écriture)를 접한 사람들은 거기에 동요된다. 별거 아닌 일상 속의 사물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화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통적인 미감이 형성되고, 학문적인 구조가 형성된다.
더러워진 세상의 떼로 인하여 추할 대로 추해진 예술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예술은 간파할 수 없는 부정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끈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의 통제 밖이다.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며,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들이 있다.
그런데 왜 예술을 공부까지 하면서 우린 누려야 할까. 예술이 삶의 필연적이라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말을 우리가 굳이 종교적으로 맹신해야 할까? 예술이란 삶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이다. 안전가옥에서도 자진해서 고문을 받는 피난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이름의 겉멋과 허영으로 우린 예술의 본질을 잊고 살고 있다.
예술이라는 것을 우린 즐기지 못한다. 어려울 대로 어려운 해석과 갖다 붙이기 식의 찬사와 논평은 우리가 예술을 즐기지 못하게 방해하며, 오히려 선입견을 심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주관에 불과한 그 담론이 마치 정답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에게 예술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의 향유는 잘못된 방법이다. 예술에 정답이란 없다. 오히려 정답 같아 보이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거나 그 틀에서 벗어날 때 더 예술다운 예술이 된다. 작품이 작품이 되는 순간처럼, 감상평과 감정 또한 그것이 되는 순간이 있다. 별거 아닌 평서문도 그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것처럼 보이는 냉철한 문장이 될 수도 있고, 때론 정반대의 의견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린 자신만의 미학을 성립하기 전에 이미 구조적인 미학을 수용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삼킨다. 예술에 대한 감정의 배설은 그저 솔직하면 되고, 그 취향 또한 본인만의 미학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기 검열이 심해진 현존재에게 예술이란 검열을 거치고 드러내는 존재의 비은폐(aletheia)가 되었으며, 그 기호와 감상 또한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그냥 즐겨라. 그냥 욕해라. 그냥 좋아해라. 작품이 별로면 그냥 넘어가라. 아무도 당신이 남들 모두 인정하는 명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핍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연유로 당신을 핍박하고, 교화시키려는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원자아(id)처럼 추구해야 하는데, 우린 미학과 예술마저도 super ego에 맡겨서 자신만의 취향을 건설하지 못했다.
내가 어떤 예술을 좋아하고, 왜 예술을 좋아하고 논하는지 모르겠는 밤에 나는 예술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를 성찰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술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예술을 오락처럼 향유하고, 누리기보단 오히려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해야만 모든 알레고리르 읽을 수 있고, 아는 만큼 작품을 이해하고 쇄도하는 담론에 동조하려 했다. 그러나 이건 예술을 누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예술을 감상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술을 정치적인 장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품이 작품인 이유와 그 작품이 더 우월한 이유 이러한 것들은 작품을 위한 담론이 아니라 그 존재와 사회 그리고 예술계에 대한 권력에 대한 담론이지, 작품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작품을 작품 그 자체로 여기기보단 예술계라는 구조와 담론의 틀에 맞춰서 그것을 이해하려 한 것이다.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나의 느낌으로 판단하지 않고, 남들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이 나는 타자의 사유를 통해서 사유하고, 예술을 감상했다.
물론 존재와 예술은 세계라는 지평 위에 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세계와 그의 담론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앎에도 나 자신의 온전한 미학을 찾기보단 다른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흔적을 보고 풀밭에서 길을 찾는 어리석은 존재였다.
물론 예술을 이해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 하지만 공부가 다가 아니다. 나의 사유와 감상. 이것이 없으면 예술을 누린 것이 아니라, 기말고사 때 미술 과목 벼락치기하는 중학생과 같이 예술을 대하는 것이다. 미술과 미학을 공부한 지 어느덧 4년. 빠르다면 빠르고, 늦었다면 느리게 난 이 사실을 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