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과 돌봄(포케) 스터디를 마치며 (2)
우리는 이제 기후위기가 실제로 체감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실존적 위기인 만큼 절박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라는 문제의 거대성과 복잡성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피한다. 누군가는 화성을 식민지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운다. 누군가는 두려움 때문에 기후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한다. 누군가는 기후위기가 구조적인 문제라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누군가는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면서 냉소적으로 대응한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다면 어떻게 지금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지구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를 돌보는 일과 지구는 돌보는 일은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기후위기가 체감되면서 이미 선명해진 사실이지만, 이를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드는 감정이 우리 안에 있다. 바로 ‘생태적 슬픔’과 ‘애도’이다. 사라져가는 지구 상의 존재를 보며 느끼는 슬픔과 애도의 감정은 우리가 바로 그 지구에 발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빙하가 모두 녹아버리고, 동식물이 멸종하고, 산불로 모든 것이 타오르고, 해수면이 상승해서 섬이 가라앉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다면 어떤 감정이 들 것인가? 애슐리 컨솔로와 캐런 랜드는 땅, 물, 공기와 다양한 생명체들의 사라짐에 대해 느끼는 깊은 슬픔을 생태적 슬픔이라고 명명하였다.
생태적 슬픔이 동반할 죄책감이나 불안, 우울과 같은 감정을 생각한다면 이를 피해서 다른 감정으로 도망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생태적 슬픔이라는 감정은 과거에 대한 반성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열망을 포함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와 유사하게 사라짐과 죽음에 대한 공동의 의례 과정인 애도 역시도 희망을 내포하는 감정으로 정의된다. 즉, 슬픔과 애도라는 감정은 사라지고 죽은 대상들의 ‘의미’를 확인하고, 이를 위해 앞으로 힘을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인 ‘희망’을 내포한다.
이제까지 멸종, 생물다양성 상실, 자연재해 등은 인간 중심주의 하에서 애도의 대상이 아니었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어떤 존재가 사라졌을 때 애도가 평등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서 동식물과 땅, 물, 공기는 공적 영역에서 자리잡지 못한 신체이다. 공적 영역에서 자리잡지 못한 존재에 대한 슬픔과 애도를 통해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성과 상호의존성을 확인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되새겨보거나 이를 기반으로 기존과는 다른 미래를 그려나가기 위한 연대와 행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제까지, 그리고 지금 현재 사라져가고 있는 지구 상의 존재를 위해 전세계가 단 하루 동안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후위기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는 것은 자기돌봄임과 동시에 지구돌봄의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당신은 기후위기 앞에서 요즘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이 글은 2024년 1학기 씨알 스터디팀인 '포케'팀이 활동을 마무리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참고 자료: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 달과나무,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 창비